Review Archive
감정의 크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어떤 판단 기준이 남았는지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록입니다.
솔직히 말할게요. 제 연애는 늘 똑같은 자리에서 끝났어요. 처음엔 다정하다가 어느 순간 벽을 세우는 사람, 잡으면 도망가는 사람, 이상하게 그런 사람한테만 심장이 뛰었어요. 착하고 표현 잘 하는 사람은 이상하게 재미가 없었고요. 이게 몇 번을 반복되니까, 문제는 상대가 아니라 저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치위생사로 일하면서 하루에도 수십 명 입안을 들여다봐요. 남의 잇몸 상태는 그렇게 세세하게 보면서, 정작 제 마음속은 한 번도 제대로 못 들여다봤더라고요. 15만원이 적은 돈은 아니라 결제창에서 며칠을 망설였어요. 근데 5만원짜리로 몇 번 겉핥기 할 바에 차라리 뿌리를 한 번 제대로 파보자 싶었어요. 이 리포트가 왜 15만원인지는 읽으면서 알겠더라고요. 100페이지가 넘는데 빈말로 채운 페이지가 없어요. 선생님이 제가 회피형인 사람한테만 끌리는 이유를 어릴 때 얘기부터 풀어주셨어요. '늘 바빴던 부모 밑에서 애정은 노력해야 얻는 거라고 배운 사람은, 저절로 주어지는 사랑을 가짜처럼 느끼고 쟁취해야 하는 사랑을 진짜라고 착각하게 된다'고요. 그래서 다정한 사람은 시시하고, 밀당하는 사람한테서 진심을 느끼는 거라고. 제가 왜 그러는지를 이렇게 뿌리까지 설명해준 사람은 처음이었어요. 읽다가 몇 번을 멈췄어요. 특히 사랑받으려고 늘 제가 먼저 애쓰다가 지쳐서 상대를 원망하는 패턴을 짚은 대목에서요. 그게 연애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았거든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저는 늘 그 사람 하루 일과를 제 것보다 먼저 외웠어요. 뭘 좋아하는지, 언제 예민한지 전부 파악해서 맞춰주다가, 정작 저는 텅 비어서 왜 나만 이렇게까지 하냐고 혼자 서운해하는 식이었죠. 헤어진 사람들이 쓰던 향수 냄새가 길에서 스치면 아직도 발이 저절로 멈추는데, 알고 보니 저는 그 사람을 그리워한 게 아니라 그 애타는 상태 자체를 그리워하고 있었더라고요. 편안한 사랑은 사랑 같지가 않아서, 늘 아슬아슬해야 살아 있는 기분이 들었던 거예요. 그게 사랑이 아니라 허기였다는 걸 이 나이에 처음 알았어요. 특히 잊히지 않는 문장이 하나 있어요. 당신은 사랑을 받는 게 아니라 얻어내는 거라고 배운 사람이라, 가만히 곁을 지켜주는 사람 앞에서는 오히려 불안해진다는 대목이요. 그 한 줄에, 왜 제가 다정한 사람들 앞에서 자꾸 딴 데를 보고 나를 애타게 하는 사람한테만 붙잡혔는지가 전부 설명됐어요. 사랑이 편해지는 순간을 저는 늘 위기 신호로 착각했던 거예요. 어떻게 제가 말도 안 한 걸 이렇게까지 아는지 좀 무서울 정도였어요 ㅋㅋ 누구한테도 보여준 적 없던 제 속이 활자로 차분히 정리돼 있는 걸 보니까, 이상하게 목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났어요. 혼나는 것도 아닌데 왜 우나 싶었는데, 나중에 알았어요. 그건 처음으로 누가 나를 제대로 봐줬다는 안도였어요. 당장 사람이 바뀌진 않겠죠. 근데 다음에 또 그런 사람한테 심장이 뛸 때, 아 이게 그 착각이구나 하고 한 번은 멈출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한 번의 멈춤을 배운 것만으로도 이 15만원은 안 아까워요. 제 연애가 늘 끝나던 그 자리를, 이번엔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