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Archive
감정의 크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어떤 판단 기준이 남았는지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록입니다.
반도체 회사에서 공정 엔지니어로 일합니다. 스물넷이고, 숫자와 데이터로 판단하는 게 익숙한 사람이라 사주 같은 걸 믿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주말마다 나가는 러닝 동호회에서 알게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몇 주째 운동이 끝나면 같이 커피를 마시는 사이가 됐는데, 이게 그냥 운동 메이트로 편한 건지 서로 마음이 있는 건지 판단할 근거가 없었습니다. 저는 확실하지 않은 일에 감정을 쓰는 걸 낭비라고 여기는 편이라, 이 애매함이 꽤 스트레스였습니다. 러닝을 하는 내내 페이스가 아니라 그 사람 생각으로 호흡이 흐트러지는 저를 발견하고는, 이건 그냥 넘길 문제가 아니라는 판단이 섰습니다. 그래서 궁합을 신청했습니다. 검증할 방법도 없는 걸 5만원 주고 보는 게 맞나 싶었지만, 몇 주째 제자리인 이 상태를 그냥 두는 것도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두 사람은 감정을 앞세우기보다 신뢰가 먼저 쌓여야 움직이는 비슷한 유형이라, 지금처럼 서서히 가까워지는 방식이 오히려 이 조합에는 정답'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답답해하던 이 느린 속도가 사실은 이 관계의 자연스러운 결이라는 얘기였습니다. 저는 관계가 더디게 흐르는 걸 상대의 미적지근함으로 읽고 속으로 원망하던 참이었는데, 그게 결함이 아니라 이 조합의 정상 속도라는 말에 오해가 풀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먼저 운동 외의 자리에서 한 번 보자고 제안하면, 상대도 기다렸다는 듯 응할 시기가 8월 안에 온다고 하셨습니다. 논리적으로 납득이 가서 시도해 봤습니다. 다음 주에 러닝 말고 그냥 저녁이나 먹자고 했더니, 상대가 흔쾌히 응했고 그날 서로 마음을 확인했습니다. 지금은 사귀는 사이가 됐습니다. 저는 확실하지 않은 것에 시간을 쓰는 걸 늘 낭비라고 못 박아 두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관계도 근거가 없으면 접는 게 맞다고 반쯤 결론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짚어 주신 건, 근거가 없는 게 아니라 이 조합은 원래 느리게 신뢰를 쌓아야 정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데이터가 부족한 게 아니라, 제가 조급하게 데이터를 뽑아내려다 오히려 관계를 왜곡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 관점을 얻고 나니, 제자리처럼 보이던 몇 주가 사실은 착실히 신뢰가 적립되던 구간이었다는 게 보였습니다. 저녁 한번 먹자는 그 한마디를 8월까지 미루지 않고 낼 수 있었던 것도, 지금이 그 타이밍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면 저는 확신이 서지 않는 상대에게 시간을 쓰는 것 자체를 실패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관계도 얼른 결론을 내서 정리하거나 진전시키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한다고 조급해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관계는 결론을 서두르는 것이 오히려 그 관계를 깨는 일이라는 걸, 이번에 배웠습니다. 느린 게 실패가 아니라 이 조합의 속도라는 그 한 줄이, 제 조급증에 대한 정확한 처방이었습니다. 감정을 데이터로만 재던 제가 이런 후기를 쓰는 게 스스로도 낯설지만, 판단의 근거가 하나도 없던 상황에서 방향을 잡아 준 건 분명합니다. 저처럼 확실하지 않은 걸 잘 못 믿는 사람일수록, 한 번쯤 이렇게 바깥의 시선을 빌려 판을 다시 읽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과장 없이, 필요한 한 걸음을 정확한 타이밍에 짚어 준 상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