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Archive
감정의 크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어떤 판단 기준이 남았는지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록입니다.
"사실 너한테 말 안 한 게 있어." 5년을 만난 사람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발밑이 소리 없이 꺼지는 기분이었어요. 대단한 거짓말은 아니었어요. 지난 몇 달간 힘든 일이 있었는데 저한테 내내 숨겨왔다는, 그런 종류였어요. 그런데 그동안 제가 믿어온 것이 통째로 기울더라고요. 우리 사이엔 비밀이 없다고 여겼던 그 믿음이요. 결국 그 신뢰의 금을 못 넘기고 헤어졌어요. 문제는 제가 아직도 그 사람을 미워하지 못한다는 거였어요. 5년이면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세월인데, 거짓말 하나로 그 시간이 없던 일이 되진 않더라고요. 붙잡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놓자니 아깝고, 그 어중간한 자리에서 몇 주를 보냈어요. 냉장고에 그 사람이 좋아하던 반찬을 습관처럼 사다 두고는, 혼자 다 상하도록 손도 못 댄 날이 많았어요. 헤어졌다는 걸 머리는 아는데 장 보는 손이 아직 둘이던 거예요. 밤마다 그 사람이 왜 그랬을까만 되짚었어요. 나를 못 믿어서였을까, 아니면 내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었나. 답 없는 물음을 굴리다 보면 어느새 창이 뿌옇게 밝아 있었어요. 그렇게 뜬눈으로 지샌 날이 손에 꼽기 어려울 만큼이었어요. 재회 상담을 받은 건 마음이라도 정리하고 싶어서였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두 사람 사주를 같이 보시더니 뜻밖의 얘길 하셨어요.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한 건 저를 속이려던 게 아니라 실망시킬까 두려워 진실을 자꾸 뒤로 미루는 성향이 강한 구조라고요. 이 사람은 나쁜 마음보다 겁이 앞서는 사람이라는 말에, 제가 그 사람을 어떤 순간마다 몰아세웠는지가 겹쳐 보였어요. 작은 실수에도 실망한 티를 감추지 못하던 제 얼굴이요. 어쩌면 그 사람은 그 얼굴이 무서워서 입을 다물었는지도 모르겠다 싶었어요. 미운 게 아니었어요. 제가 더 이상 그 사람이 숨을 돌릴 자리조차 아니게 됐다는 게, 그게 견딜 수 없었던 거예요. 물론 그렇다고 거짓말이 정당해지는 건 아니라고 선생님도 분명히 선을 그으셨어요. 다만 다시 이야기를 나눌 거라면 추궁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 사람이 솔직해질 수 있는 공기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늦가을에 대화의 문이 한 번 열리는 시기가 오는데, 그때 지난 일을 캐묻기보다 앞으로 어떻게 믿음을 다시 쌓을지를 이야기하라고 구체적으로 짚어주셨고요. 그 사람의 겁을 탓하는 대신 안심을 먼저 건네라는 말이, 5년 동안 제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방식이었어요. 리포트를 읽다가 유독 오래 멈춘 문장이 있었어요. 두 사람은 서로를 벌하려고 헤어진 게 아니라 서로를 지키는 법을 아직 못 배운 것뿐이라는 대목이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어요. 5년이나 함께했으면서 우리는 정작 그 한 가지를 못 배웠던 거예요. 아직 연락은 못 했어요. 그런데 이 리포트를 덮고 나서야, 제가 원하는 게 복수도 사과도 아니고 그냥 그 사람을 다시 한번 믿어보고 싶은 거였다는 걸 알았어요. 그걸 아는 것만으로 마음이 한결 단단해졌어요. 아직 겁은 나지만, 방향이 생겼으니 조급해하지 않으려고요. 이번엔 그 사람이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자리를 만들어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