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Archive
감정의 크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어떤 판단 기준이 남았는지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록입니다.
환경컨설팅 일을 하는 스물아홉 남자입니다. 2년 넘게 만난 여자친구랑 권태기 끝에 서로 지쳐서 헤어졌어요. 누가 크게 잘못한 것도 아니고, 그냥 둘 다 방전된 느낌이었어요. 나중엔 만나도 할 말이 없어서, 카페에 마주 앉아 각자 휴대폰만 보다 헤어지는 날이 늘었고요. 솔직히 남자가 이런 상담을 받는다는 게 좀 그랬어요. 사주로 뭘 알겠나 싶기도 했고요 ㅋㅋ 근데 정리하고 나니 자꾸 미련이 남아서, 마지막으로 객관적인 얘기라도 들어보자는 심정으로 신청했어요. 친구들한테 털어놓기도 뭐한 게, 다들 잘 헤어졌다고만 하니까요. 선생님이 '두 사람은 마음이 식은 게 아니라, 같은 시기에 각자 일로 소진되면서 서로를 돌볼 여력이 동시에 바닥난 것'이라고 하셨어요. 권태기가 아니라 타이밍의 문제였다는 거예요. 헤어진 이유를 서로한테서만 찾던 저한테는 좀 의외의 진단이었어요. 그녀가 변한 게 아니라, 둘 다 각자의 일에 눌려 서로한테 쓸 힘이 안 남았던 거죠. 제가 그녀한테 정이 떨어진 거라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라 둘 다 지쳐 있었을 뿐이라니까 원망 같던 감정이 조금 가라앉더라고요. 그녀도 저처럼 힘들었겠구나 하는 데 생각이 미치니까요. 미워할 대상이 사라지니, 남은 건 그냥 안쓰러움이었어요. 헤어진 이유를 그녀 탓으로 돌려야 마음이 편했는데, 둘 다 지쳤을 뿐이라니까 오히려 그 사람 몫의 피로까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원망이 빠진 자리는 생각보다 조용했어요. 가을 지나 둘 다 한숨 돌릴 시기가 오면 그때 가볍게 연락해보라고 하셨어요. 지금 당장 매달리는 건 오히려 역효과라고요. 방향이 생기니까, 무작정 기다리는 것보단 훨씬 나아요. 남자들도 이런 거 한 번쯤 봐도 괜찮더라고요. 남자라고 미련이 없는 게 아니잖아요. 티를 안 냈을 뿐이지, 저도 정리하고 나서 한참을 헤맸거든요. 방향이라도 잡고 나니, 헤매는 시간이 확 줄었어요. 혼자 끙끙 앓느니, 지도 한 장 받는 셈 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