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Archive
감정의 크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어떤 판단 기준이 남았는지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록입니다.
흙을 이십 년 가까이 만졌어요. 도예가라고 하면 다들 여유롭고 팔자 좋은 줄 아는데, 작업실이 전세라 만기가 다가올 때면 물레 앞에 앉아서도 손이 자꾸 멈춰요 ㅋㅋ 흙은 손이 딴생각을 하면 바로 티가 나거든요. 그릇이 한쪽으로 슬쩍 주저앉아요. 요 몇 달 제가 빚은 게 죄다 그 모양이었어요. 이번에 계약 만기가 코앞인데, 지금 자리를 지켜야 하나 아예 다른 동네로 옮겨야 하나, 옮긴다면 언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나, 그게 밤에 누우면 뱅뱅 돌아서 잠을 설쳤어요. 이사 한 번이 곧 가마를 다시 앉히고 작업이 몇 달 비는 일이라, 저한텐 그냥 집 옮기는 문제가 아니었거든요. 이 나이에 작업실 하나 스스로 못 정하고 휘둘리는 제가 한심해서, 아무한테도 이 고민을 못 꺼냈어요. 그 고민이 어느새 몸으로 왔어요. 입맛이 없어서 끼니를 자꾸 거르고, 통장에 이사 비용이며 보증금이며를 계산해두고 밤에 그 숫자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손끝이 괜히 차가워졌어요. 실패하면 안 되는 결정이라는 무게가 어깨를 눌렀거든요. 결정을 못 내리고 있다는 게 이렇게 사람 일상을 야금야금 갉는 줄 몰랐어요. 예전에 썸 상담을 한 번 받은 적이 있어서 이번에도 선생님 생각이 났어요. 연애 얘기가 아니라 이사 방향 같은 것도 봐주시나 했는데, 사주 문답으로 이런 생활 결정을 물어볼 수 있다고 해서 신청했어요. 자유질문 세 칸에 이사 시기, 방향, 그리고 작업실을 옮기면 일이 늘어날지를 적었어요. 결과지를 받고 손이 멈춘 대목이 있었어요. 제가 방향을 애매하게 적었는데도 선생님이 '올해 하반기에 서쪽이나 북서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흐름이 훨씬 안정적이고, 급하게 봄에 움직이면 계약 문제로 같은 일을 두 번 치르게 된다'고 짚으셨거든요. 저 원래 봄에 옮길 생각이었어요. 만기가 3월이라 거기 맞춰 부랴부랴 알아보려던 참이었는데, 그 조급함이 왜 손해로 돌아오는지를 근거까지 들어 설명해주시니까 마음이 확 잡혔어요. 세 번째로 적은 질문, 작업실을 옮기면 일이 늘어날지에 대해서도 두루뭉술하게 안 넘어가셨어요. 하반기에 자리를 옮기면 사람이 새로 드나드는 흐름이 열려서 주문이며 수업 문의가 붙는 시기라, 다만 그게 봄에 서둘러 옮긴 자리에서는 안 열린다고 하셨어요. 같은 이사라도 언제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갈린다는 얘기가 그렇게 손에 잡히게 들린 건 처음이었어요. 제일 좋았던 건 월별로 언제 계약 얘기를 꺼내고 언제 마무리하면 좋은지 달력처럼 정리해주신 부분이에요. 저는 늘 감으로만 움직이는 사람이라, 언제 힘이 실리고 언제는 쉬어야 하는지가 눈에 보이니까 올 하반기 계획이 통째로 잡히더라고요. 그 페이지를 프린트해서 작업실 벽에 붙여뒀어요. 연애 상담으로 시작했다가 살림살이 결정까지 물어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ㅋㅋ 혼자 끙끙 앓던 걸 누가 지도 펴놓고 여기로 가라 짚어준 기분이었어요. 아직 이삿짐은 안 쌌지만, 적어도 언제 어디로 가야 할지는 이제 알아요. 벽에 붙여둔 그 달력을 아침마다 한 번씩 보는데, 이상하게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여요. 밥도 다시 제때 챙겨 먹고요. 이사 마치고 나면 또 다른 걸로 찾아올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