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Archive
감정의 크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어떤 판단 기준이 남았는지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록입니다.
영상통화를 끊고 나면 방이 유난히 조용해져요. 화면 속에선 분명 둘이 마주 보고 웃고 있었는데, 통화가 끊기고 불 꺼진 방에 혼자 남으면 이 사람이 정말 내 사람이 맞기는 한가 싶은 밤이 있어요. 그런 밤이 쌓이고 쌓여서 궁합 상담을 신청했어요. 서른여섯이고,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과 만나고 있어요. 이 나이에 하는 장거리 연애라는 게 남들 눈엔 무모해 보일 것 같아서 주변에 말도 잘 못 했어요. 이 사람이랑 결혼까지 갈 수 있을지, 아니면 제가 붙잡을 수도 없는 데 시간을 쏟고 있는 건지, 누구한테라도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어요. 처음엔 다들 오래 못 갈 거라고 했어요. 얼굴도 못 보는 사이가 무슨 연애냐고요. 저도 가끔은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서, 이 관계를 스스로 변호하는 데 지쳐가고 있었어요. 좋아하는 마음은 분명한데, 이 마음 하나로 몇 년을 더 버틸 수 있을지가 자신이 없었던 거예요. 시차를 맞추려고 알람을 걸어놓고 자다 깨서 잠긴 목소리로 몇 마디 나누던 날들, 공항에서 몇 시간을 서성이며 기다려 겨우 며칠 얼굴 보고 또 등 떠밀리듯 헤어지던 날들. 그런 걸 겪어본 사람만 아는 외로움이 있잖아요. 저는 그 외로움을 사랑의 증거라고 우기면서 여기까지 버텨왔어요. 한번은 이 사람 답장이 반나절 넘게 없던 적이 있어요. 그쪽은 그냥 한밤중이라 자고 있었을 뿐인데, 저는 그 반나절 동안 온갖 상상을 다 했어요. 마음이 식었나, 혹시 다른 사람이 생겼나. 나중에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저 혼자 며칠을 앓곤 했어요. 그 외로움과 불안에 저도 오래 이름을 못 붙였는데, 어느 순간 알겠더라고요. 제가 진짜 무서웠던 건 이 사람과의 거리가 아니라, 이 마음이 저 혼자만의 착각으로 끝나버릴까 봐였다는 걸요. 그 마음을 확인받고 싶어서 사실은 이 상담을 신청한 거였어요. 선생님이 두 사람을 같이 보시더니 '두 분은 몸이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늘 같은 곳을 바라보는 드문 인연'이라고 하셨어요. 다만 거리 그 자체보다, 서로 힘든 시기가 하필 겹쳐서 올 때 그걸 어떻게 같이 넘기느냐가 진짜 관건이라고 짚으셨어요. 제가 늘 막연하게만 불안해하던 그 지점을 정확히 말로 꺼내주시니까, 어깨를 짓누르던 걱정이 그제야 대비할 수 있는 무언가로 바뀌더라고요. 그러면서 시차랑 거리에서 오는 오해를 줄이는 법도 구체적으로 일러주셨어요. 못 보는 시간이 길수록 사소한 말 한마디를 혼자 크게 곱씹게 되는데, 그럴 땐 절대 혼자 결론 내리지 말고 반드시 물어서 확인하는 습관을 들이라고요. 돌이켜보니 저희 다툼은 대부분 화면 너머에서 제가 오해를 혼자 키운 데서 시작됐더라고요. 그 얘길 듣고 나서 실제로 한번 그렇게 해봤어요. 답장이 늦어 또 마음이 쪼그라들려는 순간, 혼자 결론짓는 대신 무슨 일 있었냐고 그냥 물어봤어요. 알고 보니 회사 일이 밀려서 정신이 없었던 거였고, 그걸 확인하고 나니 며칠씩 혼자 앓던 게 무색하더라고요. 오해 하나를 혼자 키우지 않은 것만으로 그 주가 통째로 편안했어요. 무엇보다 이 관계가 헛된 데 시간 쏟는 게 아니라는 확인을 받은 것만으로 마음이 단단해졌어요. 이제는 통화를 끊고 혼자 남아도 예전처럼 방이 무섭게 조용하진 않아요. 관계에 이름표 하나가 붙은 것 같았어요. 무모한 짓이 아니라, 지켜볼 만한 인연이라는 이름표요. 올가을에 이 사람이 한국에 들어오면 같이 단풍 보러 가기로 했어요. 몇 년째 말만 하고 못 지킨 약속인데, 이번엔 왠지 지킬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관계를 계속 밀고 가도 되겠다는 확신 하나 얻으려고 시작한 건데, 그 이상을 받아 왔어요. 요란하진 않아도 오래 마음에 남을, 조용히 벅찬 상담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