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Archive
감정의 크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어떤 판단 기준이 남았는지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록입니다.
추석에 고향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이 후기를 처음 쓰기 시작했어요. 창밖으로 익숙한 풍경이 지나가는데 하필 그 사람이랑 작년 이맘때 이 길을 같이 내려갔던 게 떠올라서요. 서른아홉이나 먹고, 명절에 부모님 뵈러 가면서 헤어진 사람 생각이나 하고 있는 제가 좀 한심했어요 ㅋㅋ 그 사람이 창가 자리를 좋아해서 늘 제가 통로에 앉았는데, 이번엔 창가가 비어 있으니까 그 자리가 이상하게 크게 느껴졌어요. 헤어진 이유를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 분명 좋았던 사람인데 어느 순간부터 서로 날이 서더니 결국 남처럼 됐거든요. 명절에 친척들이 좋은 사람 없냐고 물을 때마다 속으로 그 사람 얼굴이 떠올라서, 이걸 그냥 묻어야 하는지 아니면 다시 손 내밀어봐야 하는지 답을 얻고 싶어서 상담을 신청했어요. 큰 기대는 없었어요. 어차피 다 지난 얘기 붙잡고 좋은 말이나 들으려는 거 아닌가, 저 스스로도 의심했거든요. 근데 결과지를 읽으면서 그 생각이 접혔어요. 선생님이 두 사람 사이가 틀어진 게 성격 문제가 아니라, 작년 한 해가 저한테 유독 예민하고 방어적으로 흐른 시기였기 때문이라고 하셨어요. 그때 저는 회사 일로 바닥까지 지쳐 있었고, 그 피로를 제일 가까운 사람한테 날카롭게 쏟았던 거예요. 이걸 제가 쓰지도 않았는데 짚으셔서 좀 멍했어요. 그해 제가 얼마나 예민했는지는 저만 아는 거였거든요. 야근에 시달리다 집에 오면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가시가 돋쳤어요. 그 사람이 오늘 뭐 했냐고 물으면 그게 취조처럼 들렸고, 밥 먹었냐는 말에도 왜 자꾸 챙기냐고 쏘아붙였죠. 그러면서도 저는 제가 변한 줄도 몰랐어요. 그 한 해가 저를 그렇게 바꿔놓은 줄을요. 그 사람은 그런 저를 일 년을 견뎌준 거였고요. 견디다 못해 놓은 거지, 정이 없어서 떠난 게 아니었다는 걸 이제야 알겠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떠난 게 정이 식어서가 아니라, 그 시기의 저를 견디기가 힘들었던 거라는 얘기였어요. 그 말이 아프면서도 이상하게 위로가 됐어요. 나라는 사람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때의 내 상태가 문제였구나 싶어서요. 돌이켜보면 그 사람은 마지막까지 저한테 뭐가 문제냐고, 같이 풀어보자고 여러 번 손을 내밀었어요. 근데 그때 저는 회사에서 이미 진이 다 빠진 상태라 그 손을 잡을 힘이 없었어요. 오히려 왜 자꾸 귀찮게 하냐는 식으로 밀어냈죠. 헤어지고 나서 제일 많이 떠오른 게 그 장면들이었어요. 내가 조금만 덜 지쳐 있었으면 달랐을까 하는 생각이요. 선생님이 그걸 두고, 그건 후회할 일이 아니라 그때의 나로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라고 하셨어요. 대신 그걸 알았으니 다음엔 내가 바닥일 때 사람부터 밀어내려는 신호를 미리 알아채면 된다고, 그게 이번 상담에서 진짜 챙겨야 할 거라고 짚어주셨어요. 그 말에 오래 묵은 마음의 짐이 조금 가벼워졌어요. 그 장면들을 떠올릴 때마다 저는 늘 저를 벌주듯 곱씹었거든요. 왜 그때 그 손을 못 잡았을까, 조금만 더 따뜻했으면 지금 옆에 있었을 텐데 하고요. 명절에 창가 빈자리를 보면서도 결국 그 생각이었어요. 근데 선생님 말을 듣고 나니, 그건 제가 모질어서가 아니라 그때의 제가 너무 소진돼 있어서였다는 게 받아들여졌어요. 자책과 반성은 다른 거라는 걸, 그동안 저는 반성해야 할 걸 자책으로만 갚고 있었던 거예요. 미워해야 할 대상이 나 자신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명절 내내 마음이 한결 순해졌어요. 원망도 자책도 아닌 자리에 서 보니, 그제야 숨이 좀 쉬어졌어요. 선생님은 지금은 그 예민했던 시기가 지나간 흐름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다시 연락한다면 예전의 날 선 내가 아니라 지금의 나로 다가가는 게 중요하다고, 옛날 얘기를 꺼내며 미안하다 사과부터 하는 방식보다 담담하게 안부부터 여는 게 낫다고 방향을 잡아주셨어요. 시기도 올가을 지나 겨울 초입이 대화를 꺼내기 순한 때라고 짚으셨고요. 무조건 다시 만나라는 얘기는 한마디도 없었어요. 오히려 다시 잇기 전에 그때의 나를 반복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부터 스스로한테 물어보라고 하셨어요. 그 신중함이 저는 더 믿음이 갔어요. 좋은 말로 재회를 부추겨서 사람 마음 들뜨게 하는 게 아니라, 제가 준비가 됐는지를 먼저 확인시키는 방식이라 오히려 고마웠어요. 다시 잇더라도 예전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한 뼘 나아진 자리에서 시작하라는 뜻으로 읽혔거든요. 기차에서 내리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요. 답이 딱 나온 건 아닌데, 적어도 제가 왜 그 사람을 잃었는지는 알게 됐으니까요. 왜 잃었는지를 알면, 다시 만나든 아니든 같은 실수는 안 하잖아요. 저한텐 그게 재회보다 먼저 필요한 답이었어요. 명절 내내 친척들 잔소리도 이번엔 좀 웃으면서 넘겼어요 ㅋㅋ 올겨울엔 용기를 좀 내볼까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