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Archive
감정의 크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어떤 판단 기준이 남았는지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록입니다.
명절에 큰집에 갔다가, 사촌 언니 결혼 얘기가 밥상에 오르는 걸 가만히 듣고 있었어요. 다들 저를 보면서 넌 언제 가냐고 웃는데, 저는 같이 웃으면서 속으로는 '나는 저거 안 할 건데'를 되뇌고 있었어요. 스물여덟, 남들은 슬슬 준비하는 나이인데 저는 결혼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몸이 먼저 굳어요. 젓가락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더라고요. 이유는 저도 알아요. 부모님이 제가 열몇 살 때 이혼하셨거든요. 그 몇 년의 냉기 속에서 자란 사람은, 결혼이 사랑의 결말이 아니라 재앙의 시작일 수도 있다는 걸 몸으로 배워요. 박사과정 내내 논문은 잘만 쓰면서, 정작 제 인생 계획서에서 결혼 칸만 텅 비워둔 채 살았어요. 남들이 보기엔 멀쩡히 잘 지내는 사람이었을 거예요. 저는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데 도가 튼 사람이었으니까요. 프리미엄 리포트를 신청한 건, 이 두려움이 진짜 제 것인지 아니면 부모님한테서 물려받은 것인지 구분하고 싶어서였어요. 무슨 대단한 답을 기대한 건 아니고, 그냥 이 감정의 정체라도 알고 싶었어요. 선생님은 제 구조를 보시고, 제가 결혼 자체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내 손으로 통제할 수 없는 관계'를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어요. 부모님의 이혼을 아이의 눈으로 지켜보면서, 사랑이라는 건 아무리 애써도 내가 어쩌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는 걸 너무 일찍 알아버린 거라고요. '당신은 결혼이 싫은 게 아니라, 통제할 수 없는 걸 사랑해야 한다는 게 무서운 사람이에요.' 그 줄을 읽고 한동안 리포트를 덮지 못했어요. 웃긴 건, 제가 연구를 택한 이유도 거기 있었던 것 같아요. 변수를 통제하고 결과를 예측하는 일이잖아요. 사랑은 그게 안 되니까 저는 늘 도망쳤던 거고요. 리포트가 제 직업 선택까지 같은 뿌리로 엮어서 설명하는데, 흩어져 있던 제 인생이 처음으로 한 줄에 꿰이는 기분이었어요. 제가 아무한테도, 심지어 신청서에도 안 쓴 게 하나 있어요. 저는 사귀다가도 상대가 진지해지면 먼저 흠을 잡아서 끝내버리는 버릇이 있거든요. 관계가 깊어지는 게 무서워서요. 그런데 선생님이 '당신은 관계가 편해지는 순간 오히려 불안해져서 스스로 균열을 내는 사람'이라고 짚으셨을 때, 제 지난 연애들이 쭉 한 줄로 설명이 됐어요. 리포트 뒤쪽에는 그럼 이 두려움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가 적혀 있었어요. 두려움을 없애라는 게 아니라, 그게 부모님의 이야기지 제 미래의 정해진 결말은 아니라는 걸 구분하는 연습부터 하라고요. 통제할 수 없는 걸 통째로 맡기지 말고, 신뢰를 아주 작은 단위로 쪼개서 연습하라는 말이 특히 현실적이었어요.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상대가 약속을 지키는 사소한 순간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말고, 하나씩 마음에 새겨두라고요. 큰 서약을 통째로 믿는 건 저한테 너무 무서운 일이니까, 아주 작은 신뢰의 증거부터 저울에 하나씩 얹어보라는 거였어요. 결혼이라는 통짜 덩어리에 겁먹고 있던 걸, 잘게 나눠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조금 트였어요. 그리고 제가 언제 이 두려움에 특히 크게 휘둘리는지 그 시기까지 짚어주셔서,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됐어요. 감정이 요동칠 때 그게 진짜 위기가 아니라 그냥 제 오래된 버튼이 눌린 거라는 걸 알면, 덜 휩쓸리게 되더라고요. 이 리포트를 읽는 며칠 동안, 저는 처음으로 그 냉기 속 어린 저를 가만히 들여다봤어요. 부모님이 서로 등을 돌린 채 밥을 먹던 식탁, 문을 닫고 들어가면 벽 너머로 새어 나오던 낮은 말소리. 그 집에서 저는 숨소리도 크게 못 내는 아이였거든요. 그때 제가 배운 건, 사랑하는 사람도 언제든 서로에게 재앙이 될 수 있다는 거였어요. 그걸 서른이 다 되도록 몸에 지니고 살면서, 저는 그게 제 성격인 줄로만 알았어요. 나는 원래 결혼 같은 거 안 어울리는 사람이라고요. 그런데 그게 제 본성이 아니라 그 시절이 새겨놓은 흉터였다는 걸, 이 글을 읽고서야 처음으로 구분하게 됐어요. 결혼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니에요. 여전히 그 단어는 조금 무서워요. 그런데 이제는 그 두려움이 저를 통째로 삼키게 두진 않을 것 같아요. 최소한 이게 어디서 온 감정인지는 아니까요. 요즘은 상대가 사소한 약속을 지킬 때마다, 그걸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마음에 한 알씩 담아둬요. 큰 믿음은 아직 무섭지만, 작은 증거들은 셀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저는 사랑을 통째로 겁내는 대신, 조금씩 나눠서 배워가는 중이에요. 오래 얼어 있던 결혼이라는 단어가, 이제는 그렇게까지 차갑지만은 않아요. 물려받은 밤을 저까지 물려주지 않으려면,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걸 알았거든요. 혹시 저처럼 부모님의 결혼을 보고 자라서, 나도 저렇게 될까 봐 시작조차 겁나는 분이 있다면요. 그 두려움이 당신 것인지 물려받은 것인지부터 나눠 보시면 좋겠어요. 그것만 알아도 숨통이 좀 트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