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Archive
감정의 크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어떤 판단 기준이 남았는지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록입니다.
이 후기를 쓰는 지금도 옆에서 여자친구가 뭐 쓰냐고 자꾸 기웃대요. 좀 민망한데, 저희 안 헤어지고 잘 지내고 있다는 얘기부터 먼저 하고 싶었어요. 스물셋이고 HR 쪽에서 일해요. 사람 뽑고 사람 관리하는 게 직업이라 남 심리는 좀 안다고 자부했는데, 정작 제 연애는 하나도 모르겠더라고요. 면접장에서 지원자 표정 하나로 긴장했는지 아닌지는 읽으면서, 제 여자친구 표정은 왜 못 읽나 싶어 자괴감이 들었어요. 저희 커플의 문제는 딱 하나였어요. 싸우면 여자친구가 입을 닫아버려요. 저는 그 자리에서 다 풀어야 잠이 오는 사람인데, 이 친구는 제가 대화를 붙일수록 더 뒤로 도망가요. 방문 닫고 들어가서 몇 시간씩 안 나와요. 그럼 저는 또 그게 서운해서 문 앞에서 혼자 씩씩대고요. 닫힌 방문을 노려보면서, 저 안에서 뭘 하고 있을까, 나를 이렇게까지 밀어낼 일인가, 별의별 생각을 다 했어요.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만 확인하다 거실 소파에서 그대로 잠든 밤도 있었어요. 이게 반복되니까 나중엔 싸운 이유보다 이 패턴 자체가 지겨워지더라고요. 솔직히 몇 번은, 이 사람이랑 계속 가는 게 맞나 하는 데까지 갔어요. 회사에서 남들 갈등 중재는 그렇게 잘하면서 왜 내 연애는 이 모양인가 싶어서 자존심이 좀 상했어요. 그러다 궁합 상담이라는 걸 알게 됐는데, 처음엔 이게 사람 관계를 얼마나 알겠나 싶었어요. 회사에서 하는 성격 검사랑 뭐가 다른가, 결국 다 좋게좋게 뭉뚱그려주는 거 아닌가 했죠. 그런데 아니었어요. 선생님이 두 사람 사주를 같이 보시더니, 제가 한 마디도 안 했는데 '두 분은 갈등이 오면 한 사람은 즉시 붙잡아 해결하려 달려들고, 한 사람은 일단 문을 닫고 안전한 곳으로 숨는 구조'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게 누가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라, 감정을 처리하는 속도 자체가 다른 거라고요. 저는 감정이 밖으로 먼저 터지는 사람이고, 여자친구는 안으로 삭이면서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래요. 회사에서 수십 명 성향은 그렇게 분류하면서, 정작 제 옆 사람 하나를 이렇게 못 읽고 있었다는 게 우습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어요. 이 말이 왜 그렇게 위로가 됐냐면요. 저는 여태 여자친구가 저를 무시해서 입을 닫는 줄 알았거든요. 근데 그게 아니라, 그 사람 나름대로 폭발을 막으려고 문을 닫는 거였어요. 저를 밀어내는 게 아니라 저한테 상처 줄까 봐 자기를 가두는 거였던 거죠. 순서가 통째로 뒤집혔어요. 그동안 그 닫힌 문을 원망하던 마음이, 그 문 뒤에서 혼자 애쓰던 사람 생각에 스르르 녹더라고요. 미운 마음이 미안한 마음으로 자리를 바꾸는 데 딱 한 문장이면 됐어요. 선생님이 방법도 구체적으로 주셨어요. 싸운 직후에 붙잡지 말고, 대신 생각 정리되면 얘기하자, 나 안 도망간다는 메시지 하나만 남기고 물러나 있으라고 일러주셨어요. 그리고 여자친구가 다시 나왔을 때 그 사이 있었던 일을 추궁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숨었던 걸 혼내면 다음엔 더 깊이 숨는다고요. 반신반의하면서 딱 한 번 그대로 해봤어요. 손이 근질거렸지만 문을 두드리는 대신 짧은 메시지 하나만 보내고 거실에 앉아 있었어요. 붙잡고 싶은 걸 참는 그 몇 시간이 제일 어려웠어요. 그런데 두 시간 만에 여자친구가 먼저 방문 열고 나와서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여태 며칠씩 이어지던 냉전이 두 시간으로 줄어든 거예요. 며칠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두 시간 만이라니, 방법 하나 바꿨을 뿐인데 이렇게 달라지나 싶어 좀 얼떨떨했어요. 그날 여자친구가 나와서 한 말이 아직도 귀에 남아요. 자기도 문 닫고 들어가서 미안하다고 생각은 하는데, 그 순간엔 도저히 말이 안 나온다고요. 그 안에서 폰만 만지작대면서 언제 나갈까 저 혼자 눈치를 보고 있었대요. 여태 저는 그 침묵을 저한테 주는 벌이라고 받아들였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도 그 문 뒤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던 거예요. 그 며칠간의 냉전이 실은 서로를 향한 두 종류의 안간힘이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어요. 저는 관계를 붙잡으려고, 그 사람은 관계를 지키려고, 방향만 반대였던 거죠. 선생님이 짚어주신 그대로였어요. 그 뒤로 저희 싸움의 결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여전히 부딪히긴 해요. 근데 이제 서로 어떻게 식는 사람인지 아니까, 상대가 조용해져도 예전처럼 버림받는 기분이 안 들어요. 조용해진 그 사람을 기다려주는 게, 이제는 방치가 아니라 배려라는 걸 아니까요. 가을에 단풍 보러 가자던 약속도 이번엔 진짜 지킬 수 있을 것 같아요. 작년 그맘때는 냉전 중이라 못 갔거든요. 그때 못 간 그 길을 올해는 나란히 걸을 생각을 하면 좀 실없이 웃음이 나요. 남자들이 이런 상담 잘 안 받는 거 아는데, 저처럼 여자친구가 왜 저러는지 도무지 모르겠는 분이 있다면 한번 받아보시라고 하고 싶어요. 상대를 바꾸는 게 아니라 상대의 사용설명서를 손에 쥐는 느낌이었거든요. 이 친구랑 앞으로 얼마나 더 부딪힐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그 침묵이 무섭지 않다는 게 제일 큰 변화예요. 여자친구도 요즘은 화가 나면 먼저 나 좀 있다가 얘기할게 하고 들어가요. 그 한마디가 뭐라고, 문이 닫혀도 이제 불안하지가 않아요. 5만원 아깝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들어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