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Archive
감정의 크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어떤 판단 기준이 남았는지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록입니다.
헤어진 사람이랑 어제 마주 앉아 저녁을 먹고 왔어요. 재결합이라고 못 박기엔 아직 이르지만, 다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는 됐어요. 스물여덟에 동거까지 했으면 웬만하면 결혼으로 갈 줄 알았는데, 웃기게도 저희를 갈라놓은 건 무슨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설거지랑 빨래였어요. 네일아티스트라 손끝은 야무진데 정작 제 살림엔 영 소질이 없거든요. 싱크대에 그릇이 쌓이고, 빨래 바구니가 넘치고, 그걸 누가 하느냐로 매일 얼굴을 붉히다 보니 정이 조금씩 닳아버린 거죠. 사랑이 대단한 걸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사소한 걸로도 닳는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헤어지고 나서는 이 사람하고 이대로 영영 남이 되는 건가 싶어서, 밤마다 마음이 서늘했어요. 재회 상담을 받았는데, 선생님이 저희 둘을 같이 보시더니 두 사람 다 애정이 식은 게 아니라 생활의 마찰을 감정 문제로 착각하고 있었다고, 이건 사람이 안 맞는 게 아니라 공간을 나누는 규칙이 없었던 거라고 딱 잘라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한마디에 좀 허탈하게 웃었어요. 우리가 겨우 집안일 때문에 헤어졌다고? 그리고 다시 붙으려면 감정에 호소하지 말고 생활의 규칙부터 새로 짜라고, 재회의 열쇠가 로맨스가 아니라 역할 분담이라는 게 저희한텐 정확한 진단이었어요. 그 방향대로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작했더니, 막혔던 실마리가 조금씩 보이더라고요. 너 왜 안 했어로 시작하던 대화를, 이건 누가 맡을까로 바꾸니까 싸움이 눈에 띄게 줄었어요. 누가 언제 뭘 맡을지 종이에 적어보는 게 이렇게 로맨틱할 줄은 몰랐어요. 헤어진 이유가 사람이 아니라 규칙이었다는 걸 아니까, 다시 붙는 일이 막막하지 않았어요. 감정을 되살리는 것보다 규칙을 새로 짜는 게 훨씬 손에 잡히는 일이니까요. 사랑을 대단한 걸로 지키려다 놓쳤는데, 정작 사랑을 지키는 건 설거지 당번 같은 사소한 약속이더라고요. 살림 못하는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5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