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Archive
감정의 크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어떤 판단 기준이 남았는지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록입니다.
헬스장에서 늘 같은 저녁 시간에 마주치는 사람이 있었어요. 러닝머신 옆자리에서 몇 주를 눈인사만 하다가, 어느 날 그쪽에서 운동 자주 오시네요 하고 먼저 말을 걸어왔고 그렇게 연락처를 주고받았어요. 근데 번호를 받고 나서가 더 문제였어요. 이 사람이 저를 그냥 운동 메이트로 보는 건지, 아니면 저처럼 마음이 있는 건지 도무지 감이 안 잡혔거든요. 약국에서 하루 종일 사람을 상대해요. 처방전은 글씨가 아무리 흘려 써 있어도 척척 읽는데, 그 사람 마음은 한 줄도 못 읽겠더라고요. 먼저 연락하자니 착각이면 창피할 것 같고, 가만있자니 이대로 흐지부지될까 봐 초조하고. 장마라 운동도 뜸해지면서 마주칠 일마저 줄어드니까 마음이 더 급해졌어요. 카톡 대화창을 열어놓고 뭐라고 보낼지 썼다 지웠다만 며칠을 했어요. 그 며칠, 이 리뷰 읽는 분 중에도 분명 아는 사람 있을 거예요. 괜히 자존심 세우다 이 인연을 놓치는 건 아닐까, 그 며칠 동안 저울질만 하던 저를 나중엔 좀 원망했어요. 좋아하면서도 먼저 다가가는 게 지는 것 같아서, 스물 몇 살 때부터 늘 그렇게 재다가 놓친 사람이 몇 있었거든요. 이번에도 그 버릇이 나올까 봐, 그 초조함이라도 덜고 싶어서 상담을 받았어요. 선생님이 상대 기운을 보시더니 '이 사람은 관심이 있어도 먼저 훅 들어오는 유형이 아니라, 상대가 문을 살짝 열어주면 그제야 성큼 들어오는 구조'라고 하셨어요. 그러니 제가 아주 작은 신호 하나만 주면 된다고, 부담스럽지 않게 운동 끝나고 커피 한잔 정도가 딱이라고 방향을 주셨고요. 다가갈 타이밍도 미루지 말고 이번 주 안이 좋다고 콕 짚어주셨어요. 돌아보면 저는 늘 마음을 먼저 들키는 쪽이 지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좋아할수록 더 무심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했고요. 근데 선생님 말대로 이 사람한테는 그 무심함이 관심 없음으로 읽혔을 수도 있겠더라고요. 먼저 문을 여는 게 지는 게 아니라, 그냥 문을 여는 거였어요. 스물 몇 살 때 그렇게 재다가 놓친 사람들이 그제야 떠올랐어요. 용기 내서, 비 오는 김에 근처 카페나 가실래요 하고 제가 먼저 문자를 보냈어요. 그 문자를 보내기 전날 밤, 보낼 문장을 열 번쯤 고쳐 썼어요. 너무 들이대는 것 같지도, 너무 심심하지도 않게요. 손가락이 떨려서 보내기 버튼을 한참 노려봤어요. 근데 그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왔어요. 알고 보니 그쪽도 저한테 연락하고 싶었는데 부담될까 봐 참고 있었대요. 우리 둘이 며칠을 똑같이 카톡 창만 붙잡고 앉아서, 서로 먼저 열어주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그 얘길 듣는데 허탈하면서도 웃음이 났어요. 그 며칠이 아까우면서도, 서로 그만큼 조심스러웠다는 게 밉지가 않더라고요. 지금 정식으로 만나기로 했어요. 먼저 문을 열어주라던 그 한마디가 아니었으면, 저는 아직도 썼다 지웠다만 하고 있었을 거예요. 좋아하는 마음을 먼저 내보이는 게 손해라고만 여겨온 제가, 이번엔 그 한 발을 먼저 뗐다는 게 스스로도 대견해요. 재느라 흘려보낼 뻔한 그 며칠이, 이제는 웃으면서 같이 얘기하는 우리 둘의 첫 이야기가 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