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Archive
감정의 크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어떤 판단 기준이 남았는지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록입니다.
결혼 얘기를 꺼낸 바로 다음 날부터, 그 사람 연락이 눈에 띄게 줄었어요. 답장이 하루에 한두 번으로 줄더니, 만나자는 말엔 자꾸 일이 바쁘다는 핑계가 붙었고, 결국 한 달 뒤에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다며 떠났어요. 내가 너무 앞서갔나 싶어서 그 한 달을 통째로 자책만 했어요. 임상병리사라 하루에도 검사 수치를 수백 개씩 읽어요. 정상인지 아닌지 숫자만 보면 딱 아는데, 정작 사람 마음 하나는 못 읽겠더라고요. 결혼이라는 단어가 사람을 이렇게 도망가게 만들 줄 몰랐어요. 밤마다 그때 그 말을 꺼내지 말걸, 조금만 더 기다릴걸, 하고 그날 저녁을 몇 번이고 되감았어요. 이런 상담을 받으면서도 마음 한쪽은 삐딱했어요. 어차피 여자 편들어주면서 다 잘될 거라고 하겠지, 그런 게 무슨 도움이 되나 싶었거든요. 근데 선생님은 제 편을 들어주기는커녕, 제가 놓친 걸 짚으셨어요. '이 사람은 결혼이 싫은 게 아니라, 큰 결정을 앞두면 일단 도망쳐서 혼자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유형이라, 이건 거절이 아니라 유예를 요청한 것에 가깝다'고요. 저는 그걸 최종 거절로 못 박고, 상처받기 전에 먼저 마음을 접으려던 거였어요. 그 한 달 동안 저는 결혼이라는 단어를 꺼낸 그날 저녁을 수십 번 되감았어요. 그 사람 표정이 언제부터 굳었는지, 내가 어떤 말투로 말했는지, 검사 결과지 판독하듯 제 기억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어요. 그러다 답장이 안 오는 날엔 병원 탈의실에서 잠깐 앉아 마음을 고르고 나오기도 했고요. 제일 아팠던 건 이 대목이었어요. 카톡 목록만 열었다 닫았다 하던 그 밤들을 저만 겪은 게 아니라는 걸, 선생님 글에서 느꼈어요. 조급함이 관계를 밀어낸다는 문장에서 오래 멈췄어요. 아무한테도 말 못 하고 혼자 삼키던 그 시간을 누가 알아준 것만으로, 막혀 있던 목이 조금 트였어요. 제가 미워했던 게 사실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말을 꺼낸 저 자신이었다는 것도 그제야 알았어요. 그 사람은 도망친 게 아니라 정리할 시간을 달라고 한 건데, 저는 저를 벌주느라 그 시간을 못 견딘 거였고요. 기다림이 힘들었던 게 아니라, 그 기다림 내내 저를 탓하느라 두 배로 힘들었던 거예요. 검사실에서 저는 늘 결과가 나오기까지 몇 분을 못 기다려서 기계 앞을 서성이는 사람이에요. 근데 사람 마음은 원심분리기처럼 돌린다고 답이 빨리 나오는 게 아니더라고요. 그 사람한테도 가라앉을 시간이 필요했던 건데, 저는 제 불안을 못 견뎌서 그 시간을 자꾸 재촉으로 메우려 했던 거예요. 확답을 받아야만 안심이 되는 제 조급함이, 정작 상대가 마음을 정리할 틈을 안 줬던 거죠. 선생님은 상대가 정리를 끝내고 다시 마음을 여는 시기를 여름 지날 무렵으로 보셨어요. 그런데 지난주에, 그 사람이 먼저 안부를 물어왔어요. 결혼 얘기는 서로 안 꺼내고 그냥 밥이나 먹자고요. 딱 선생님이 말한 그 흐름이었어요. 아직 결론이 난 건 아니에요. 근데 제가 그때 성급하게 끝내버렸다면 오지 않았을 연락인 건 분명해요. 기다릴 줄 아는 것도 사랑이라는 걸, 서른이 되어서야 이번에 처음 배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