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Archive
감정의 크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어떤 판단 기준이 남았는지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록입니다.
스물두 살에 헤어진 첫사랑을 마흔둘에 다시 만났습니다.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 사람을 보는 순간 심장이 고등학교 때처럼 뛰었어요.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드라마 같았는데, 아이 학부모 모임에서 만난 거예요. 강당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맞은편에 앉아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어요.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하고 자세히 보는 순간 숨이 멎었어요. 그 사람이었어요. 20년 전에 제 앞에서 기타 치면서 웃던 그 소년이, 양복을 입고 학부모 의자에 앉아있었어요. 저도 결혼했고 그 사람도 결혼했어요. 서로를 알아본 순간 공기가 달라졌어요. 주변에 다른 학부모들이 가득한데도 우리 둘만 유리벽 안에 있는 것 같았어요. 모임이 끝나고 복도에서 마주쳤는데 그 사람이 먼저 이름을 불렀어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20년이 한 번에 감겼어요. 체육관 뒤편에서 몰래 손을 잡았던 겨울 방학, 교문 앞에서 매일 기다리며 서로를 찾았던 아침, 졸업식 날 하지 못한 약속들. 그 모든 게 한 번에 밀려왔어요. 처음에는 그냥 반가운 마음이었어요. 카페에 앉아서 옛날 얘기하면서 웃고, 그때 몰래 좋아했다는 고백도 하고, 서로 이런 인연이 있었구나 신기해했어요. 그 사람이 웃을 때 눈가에 생긴 잔주름이 새로웠어요. 20년이라는 시간이 만든 주름인데 이상하게 그게 더 좋아 보였어요. 그때의 소년보다 지금의 남자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는 게 스스로도 당황스러웠어요.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 그다음에는 이틀에 한 번, 어느 순간 매일이 됐어요. 감정이 점점 이상해졌어요. 남편이 옆에 있어도 폰이 울리면 가슴이 두근거렸고, 밤에 남편이 자고 나면 이불 속에서 그 사람 카톡 프로필을 몇 번이나 들여다봤어요. 단톡방에서 그 사람이 글을 올리면 괜히 가슴이 뛰고, 그 사람이 다른 여자 학부모랑 대화하는 걸 보면 속이 쓰렸어요. 나이 마흔에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자괴감이 들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어요. 어느 날 장을 보러 마트에 갔는데 그 사람이 좋아한다고 했던 커피가 진열대에 놓여있었어요. 아무 생각 없이 그걸 집어 들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을 때 소름이 끼쳤어요. 남편이 먹는 커피도 아니고, 나 혼자 마실 것도 아닌데, 그 사람이 좋아하는 커피를 사고 있었어요.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다시 꺼내놓았다가, 결국 안 샀는데 집에 오는 내내 그 커피 생각이 났어요. 내가 정말 위험한 선을 넘고 있구나, 하는 자각이 그때 처음 왔어요. 남편은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오히려 좋은 사람이에요. 성실하고, 아이들한테 좋은 아빠이고, 월급을 한 푼도 안 빼고 집에 넣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결혼 15년 차에 연애 감정 같은 건 사라진 지 오래예요. 동반자라는 이름 아래 같이 밥 먹고 같이 자고 같이 아이를 키우는, 그냥 공동 운영자가 된 거예요. 서로 손을 잡은 게 언제인지도 기억이 안 나요. 그러다 첫사랑을 만나니까 내가 얼마나 메마른 삶을 살고 있었는지가 한 번에 느껴진 거예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사람이 물을 거부할 수 있나요. 상담을 신청한 건 이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서였어요. 하루에도 열두 번씩 결심이 바뀌었어요. 아침에는 '연락을 끊어야 해, 이건 미친 짓이야' 하다가도 저녁에 그 사람 메시지가 오면 '이렇게 행복한데 뭐가 잘못인 거지' 하면서 또 답장을 보내고 있었어요. 밤에 천장을 보면서 울었어요. 죄책감과 설렘이 동시에 밀려오는 게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감정이더라고요. 아이들이 엄마 왜 눈이 빨개 하고 물을 때 알레르기라고 둘러댄 적이 몇 번인지 모르겠어요. 한 번은 학부모 단체 식사 자리에서 옆자리에 앉게 됐어요. 팔꿈치가 스칠 정도로 가까이 앉아있었는데 그 짧은 거리가 온 몸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어요. 그 사람이 물 따라주면서 손등이 제 손에 닿았을 때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어요. 마흔둘에 이런 감정을 느끼는 내 자신이 무섭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어요. 집에 돌아와서 남편이 자는 옆에 누워있는데 그 사람 손등의 온도가 계속 느껴졌어요. 이건 안 되겠다, 누군가한테 이 감정을 말하지 않으면 내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겠다 싶었어요. 선생님이 두 사람 사주를 보시더니 이 인연이 20년 만에 다시 만난 게 우연이 아니라고 하셨어요. 전생에서부터 이어진 깊은 인연인데, 이번 생에서 풀어야 할 숙제가 남아있는 관계라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와르르 쏟아졌어요. '숙제'라는 표현이 너무 정확했어요. 이 감정이 단순한 외도의 유혹이 아니라 내 안에서 20년 동안 닫아놓았던 문이 열린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으니까요. 다만 선생님은 이 감정에 휩쓸려서 행동으로 옮기는 건 두 가정 모두를 무너뜨린다고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핵심적인 분석을 해주셨는데, 지금 제가 느끼는 감정은 첫사랑 그 사람에 대한 게 아니라 스물두 살의 나 자신에 대한 그리움이 투영된 거라고요. 그때의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내가 그리운 거지, 마흔둘의 그 남자와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면 현실의 무게 앞에서 환상은 금방 깨진다고 하셨어요. 들으면서 가슴이 아팠지만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대신 이 감정을 계기로 남편과의 관계를 다시 돌아보라고 하셨어요. 결혼 생활에서 내가 포기한 것들, 남편한테 말하지 못한 서운함들, 나 자신을 위해 살지 못한 시간들. 이런 걸 정리하고 남편과 솔직한 대화를 시도해보라고요. 그리고 첫사랑과는 점진적으로 연락 빈도를 줄이되 갑자기 차단하면 오히려 미련이 커지니까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라는 구체적인 전략도 주셨어요. 솔직히 처음에는 듣고 싶은 말이 아니어서 실망했어요. 마음 한구석에서는 괜찮다고, 운명이라고, 전생의 인연이니 따르라고 말해주길 바랐거든요. 그런데 며칠이 지나니까 선생님 말씀이 맞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결정적이었던 건 큰아이가 학교에서 가족 그림을 그려온 날이었어요. 아빠 엄마 그리고 자기, 세 사람이 손잡고 웃고 있는 그림. 냉장고에 붙여놓은 그 그림을 보면서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나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아이들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엄마가 행복해야 한다는 건 맞지만 그 행복이 아이들의 세상을 무너뜨리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고. 남편한테 처음으로 진지하게 대화를 요청했어요. 15년 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을 꺼냈어요. 당신이 나를 여자로 안 본 지 오래됐다고, 나도 아직 설레고 싶다고, 우리 사이에 뭔가 달라져야 한다고. 남편이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저를 보더니 미안하다고 했어요. 나도 그걸 느끼고 있었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고. 그 밤에 남편이 제 손을 잡았어요. 몇 년 만인지 모르는 손잡기에 눈물이 났어요. 그 손이 따뜻하다는 걸 다시 느꼈어요. 아, 이 사람의 손도 따뜻했구나. 첫사랑의 손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 손의 온도를 잊고 있었던 거예요. 아직 첫사랑에 대한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에요. 아마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거예요. 가끔 학부모 모임에서 그 사람을 마주칠 때 여전히 가슴이 뛰어요. 하지만 이제는 그 감정이 뭔지 알아요. 그건 사랑이 아니라 그리움이에요. 스물두 살의 나에 대한 그리움. 그 감정을 안고도 올바른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다는 걸 이 상담이 알려줬어요. 이 상담이 아니었으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했을 것 같아요. 두 가정과 네 아이의 세상을 무너뜨릴 뻔했어요. 감사합니다.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