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Archive
감정의 크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어떤 판단 기준이 남았는지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록입니다.
수업이 다 끝난 빈 요가원에 혼자 남아, 매트 위에 누워 천장만 올려다보고 있었어요. 서른일곱, 요가 강사예요. 남들한테는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면서, 정작 제 연애는 왜 매번 같은 자리에서 넘어지는지 저조차 몰랐어요. 저는 늘 저를 애타게 만드는 사람한테만 끌렸어요. 다정하고 저를 아껴 주는 사람은 이상하게 시시하게 느껴지고, 잡힐 듯 안 잡히는 사람한테만 마음이 갔어요. 그렇게 몇 번의 연애가 다 비슷하게 끝나고 나니, 이건 상대 문제가 아니라 제 문제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근데 그 뿌리가 뭔지를 모르니 고칠 수가 없었어요. 좋은 사람을 만나도 결국 내가 망칠 걸 아니까, 언제부턴가 시작하기도 전에 지치더라고요. 일반 상담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 프리미엄으로 신청했어요. 15만원이 적은 돈은 아니라 결제 버튼 앞에서 손이 떨렸지만, 이 패턴을 또 반복하며 몇 년을 더 버리느니 이번엔 제대로 알고 싶었어요. 리포트는 정말 두툼했고, 저는 그걸 밤새 읽었어요. 선생님이 제 어린 시절 가족 구조부터 짚으시는데, '당신은 조건 없이 사랑받아 본 기억보다, 잘해야 인정받는 환경에서 자란 흔적이 짙다'고 하셨어요. 특히 부모님 중 한 분의 애정이 늘 조건부였던 구조가, 지금 당신이 쉽게 주어지는 사랑은 못 믿고 애써 얻어내야 하는 사랑에만 진짜라고 느끼게 만들었다고요. 그 문장을 읽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아무한테도, 심지어 저 자신한테도 설명 못 했던 걸 누가 대신 말로 꺼내 준 게 처음이었거든요. 제가 회피형인 사람한테만 끌린 게 취향이 이상해서가 아니라, 그 밀당의 긴장감이 어릴 때 익숙했던 그 상태, 사랑을 얻어내려 애쓰던 그 감각과 똑같았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편한 사랑이 시시했던 게 아니라, 편한 사랑 앞에서 제가 뭘 해야 할지를 몰라 불안했던 거였어요. 사랑받는 게 아니라 사랑을 따내는 것만 배운 사람이라, 아무 대가 없이 주어지는 애정 앞에서는 오히려 손이 떨렸던 거죠. 그 대목에서 저는 제 지난 연애들이 완전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저를 아껴 주던 사람들한테 제가 왜 그렇게 못되게 굴었는지도 그제야 이해가 됐고요. 제가 스스로한테 실망하며 살아온 그 오랜 자책이, 사실은 방향이 완전히 틀린 죄책감이었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선생님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 패턴을 끊으려면 다음 연애에서 설레지 않는 안정감을 밀어내지 말고 한 번만 견뎌 보라고 하셨어요. 그 심심함이 사실은 건강함이라는 걸 몸으로 겪어 봐야 뇌가 새로 배운다고요. 그리고 부모님과의 관계에서도, 인정을 받으려 애쓰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저를 먼저 제가 인정해 주는 연습부터 하라고 구체적인 방향을 주셨어요. 리포트를 덮고 나서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어요. 서른일곱 해 동안 제가 왜 그렇게 살아왔는지, 그 지도를 처음 받아 든 기분이었거든요. 누구를 원망할 일도 아니었어요. 그냥 그렇게 배운 대로 사랑해 온 것뿐이었더라고요. 리포트를 받은 뒤로 저는 제 지난 연애들을 하나씩 다시 떠올려 봤어요. 그때마다 제가 먼저 트집을 잡고 도망친 상대들이, 사실은 저한테 가장 다정했던 사람들이었더라고요.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게 아팠어요. 하지만 그 아픔이 저를 갉아먹는 자책이 아니라, 다음엔 다르게 해 보자는 다짐으로 바뀌는 걸 느꼈어요. 요즘 저는 누가 저한테 조건 없이 잘해 주면, 예전처럼 불편해서 밀어내는 대신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보는 연습을 해요. 아직 어색하지만, 그 어색함이 병이 아니라 회복의 시작이라는 걸 이제는 아니까요. 수업 끝나고 빈 요가원에 누워 천장을 볼 때도, 예전처럼 저를 나무라는 대신 오늘 하루 잘 버텼다고 저를 다독여 줘요. 무엇보다 이 리포트가 준 건 위로가 아니라 이해였어요. 위로는 아파도 괜찮다고 등을 두드려 주는 거지만, 이해는 왜 아픈지를 설명해 줘요. 저는 그 오랜 세월 위로만 받아 왔지, 제가 왜 이렇게 사랑하는지를 설명 들은 적이 없었거든요. 그 뿌리를 알고 나니, 같은 실수를 또 할까 봐 겁내던 마음보다 이제는 다르게 해 볼 수 있다는 기대가 더 커졌어요. 저를 미워하는 법만 알던 사람이, 처음으로 저를 이해하는 법을 배운 거예요. 1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 부담스러울 줄 알았는데, 한 장 한 장이 다 제 얘기라 오히려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저는 이 리포트를 지금도 힘들 때마다 가끔 다시 꺼내 읽어요. 연애 상담을 받은 게 아니라, 제 인생 전체를 처음으로 온전히 이해받은 기분이에요. 같은 사랑을 반복하며 스스로를 미워하던 분이 계시다면, 그 반복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것만 말씀드리고 싶어요. 이 리포트는 저한테 연애 설명서가 아니라, 저를 더는 미워하지 않는 법에 대한 안내서였어요. 저는 그 이유를 알고 나서야 비로소 저를 조금 용서할 수 있었어요. 아직 그 오랜 습관이 다 사라진 건 아니지만, 이제는 적어도 제가 왜 이러는지는 아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