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Archive
감정의 크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어떤 판단 기준이 남았는지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록입니다.
병원에서 야간 당직을 서던 밤에 예전 리포트를 다시 꺼내 읽었어요. 방사선사로 일하면 밤 근무가 잦은데, 남들 다 자는 시간에 혼자 판독실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자꾸 뒤로 흘러요. 그날도 예전에 받은 리포트에서 '가을에 관계의 방향이 한 번 정해진다'는 대목이 자꾸 눈에 밟혔어요. 그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가 궁금했어요. 상대가 결정을 내린다는 건지, 무슨 일이 생긴다는 건지. 그 한 줄을 붙잡고 몇 주를 혼자 별별 해석을 다 했거든요. 추가질문이 이런 후속 궁금증 물어보라고 있는 거라길래 딱 그 한 대목만 물었어요. 물어보면서도 이렇게 짧은 질문 하나에 성의 있는 답이 올까 싶었어요. 근데 선생님이 그 '방향이 정해진다'는 게 상대가 저를 어떻게 하기로 결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제가 먼저 제 태도를 정하게 되는 시기라는 뜻이라고 풀어주셨어요. 저는 그동안 은근히 상대 쪽 결정만 기다리면서, 그 사람 연락 하나에 밥맛이 있었다 없었다 했거든요. 답이 안 오는 날은 저녁 생각도 없이 그냥 누워버리고요. 그 대목이 좀 뜨끔했어요. 기다리는 사람은 저였는데, 정작 공은 제 손에 있었던 거예요. 짧은 답 하나에 방향이 통째로 바뀌었어요. 몇 줄 안 되는 답인데도, 제가 몇 주를 끌어안고 있던 질문을 정확히 반대 방향에서 열어주더라고요. 그 밤 이후로 상대 답장만 들여다보던 버릇을 접었어요. 당직 서는 밤이 여전히 길지만, 이제 그 시간에 남 눈치 보는 대신 제 마음부터 챙겨요. 만원이 하나도 안 아까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