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Archive
감정의 크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어떤 판단 기준이 남았는지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록입니다.
마흔이 되도록 사주라는 걸 한 번도 믿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회사 후배가 상담을 받고 도움을 받았다는 얘기를 가을 등산 모임에서 지나가듯 들었을 때도, 속으로는 그런 걸로 뭘 알겠나 했습니다. 반신반의라는 말도 사실 제겐 과분하고, 거의 안 믿는 쪽에 가까웠어요. 그런데 그 무렵 제가 사람 문제로 오래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관계가 하나 어긋나면서, 내가 뭘 잘못한 건지 아니면 그 사람이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지가 도무지 정리가 안 되더군요. 나이 마흔에 이런 걸로 잠을 설친다는 게 스스로도 한심했지만, 마땅히 물어볼 데가 없었습니다. 친구들한테 털어놓기엔 다들 각자 사느라 바빴고,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약한 모습 같아서 입이 안 떨어졌어요. 그러다 후배가 받았다는 그곳에 반쯤 오기로 신청을 했습니다. 아니면 아닌 거 확인하자는 심정이었어요. 결과를 받아 읽으면서 처음 든 생각은, 내가 적은 것보다 이 사람이 더 많은 걸 말하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저는 상황만 건조하게 몇 줄 적었는데, 선생님이 '이 관계에서 당신은 늘 먼저 물러서는 쪽이었고, 그게 양보가 아니라 갈등 자체를 피하고 싶은 오래된 습관에서 온 것'이라고 짚으셨어요. 이건 제가 쓴 적이 없는 내용입니다. 제가 평생 그래 왔다는 걸, 사람들과 부딪히기 싫어서 늘 내가 먼저 접었다는 걸, 처음 보는 사람이 몇 글자 정보만으로 짚어낸 겁니다. 그 줄에서 눈이 한참 멈췄습니다. 그러고는 처음부터 다시 천천히 읽었어요. 선생님은 그 습관이 언제부터 강해졌는지, 어떤 시기에 특히 저를 힘들게 하는지를 흐름으로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겪는 이 문제도 상대가 유별나서가 아니라, 제가 또 먼저 물러서면서 상대에게 잘못된 신호를 준 데서 커진 거라고 하셨어요. 억울하게 들릴 법도 한데, 이상하게 반박이 안 됐습니다. 다 맞는 말이었거든요. 생각해보면 회사에서도 저는 늘 그랬습니다. 부당한 지시가 내려와도 괜히 분란 만들기 싫어서 그냥 삼키고, 집에서도 의견이 갈릴 것 같으면 먼저 입을 닫았어요. 그게 어른스러운 거라고, 성숙한 태도라고 스스로를 다독여 왔는데 선생님 설명을 듣고 나니 그건 성숙이 아니라 회피였더군요.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삼켜온 게 쌓이고 쌓여서, 정작 나를 지켜야 할 순간에도 몸이 먼저 물러서는 사람이 돼 있었던 겁니다. 이번 관계도 딱 그 순서대로 어긋난 거였고요. 마흔 넘어서 이걸 처음 마주하려니 부끄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방향도 두루뭉술하지 않았습니다. 이번만큼은 먼저 접지 말고, 불편해도 내 입장을 한 번은 분명히 말해보라고 하셨어요. 그게 관계를 깨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오래 갈 관계를 거르는 방법이라고요. 언제, 어떤 식으로 그 얘기를 꺼내면 좋을지 시기까지 짚어주셨습니다. 혼자 삭이지 말고 상대가 방어적으로 나오지 않을 자리에서 담담하게 꺼내라는 것, 한 번에 다 쏟지 말고 딱 한 가지만 분명히 말하라는 것까지 구체적이었어요. 평생 누가 이런 걸 앉혀놓고 가르쳐준 적이 없어서, 그 몇 줄이 저한텐 사용설명서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여태 제 감정을 말로 꺼내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습니다. 화가 나도 삼키고, 서운해도 웃어넘기고, 그게 남자다운 거라고 배우며 컸으니까요. 그렇게 삼킨 말들이 어디로 갔겠습니까. 정작 필요한 순간에 목구멍에서 안 나오는 사람이 돼 있었던 거지요. 이번 리포트를 읽으면서 제일 오래 붙잡고 있었던 건 제 문제를 알아낸 페이지가 아니라, 그러니 이제 한마디쯤은 해도 된다고 저한테 허락을 내주는 것 같은 그 부분이었습니다. 누가 나한테 화내도 된다고, 서운하면 서운하다고 말해도 된다고 해준 게 그게 처음이었으니까요. 마흔 먹은 남자가 그런 허락 한 줄에 마음이 풀린다는 게 우습지만, 정말 그랬어요. 늘 참는 게 미덕인 줄 알고 사십 년을 그렇게 살았는데, 그 미덕이 실은 저를 조금씩 지워온 거였더군요. 이제라도 제 목소리를 되찾는 연습을 해보려 합니다.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이 나이에 배운 것치고는 값진 배움이니까요. 다 읽고 나서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 믿던 사람이 이런 글을 쓰고 있다는 게 저도 낯설어요. 뭐가 하나 딱 맞아서 놀랐다기보다는, 누가 나를 이렇게까지 들여다보고 정리해준 적이 없었다는 게 컸습니다. 마흔에 처음으로 내 문제를 남의 입을 통해 객관적으로 들은 셈이에요. 늘 나만 참으면 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어도 된다는 말을 처음 들은 것 같아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습니다. 가을이 지나기 전에 미뤄둔 그 대화를 해보려 합니다. 결과가 어떻든, 적어도 이번엔 도망치지 않을 것 같아요. 안 믿던 사람의 후기라 더 솔직하게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