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Archive
감정의 크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어떤 판단 기준이 남았는지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록입니다.
영상을 편집하다가 컷을 넘기던 손이 자꾸 멈췄어요. 3년 넘게 친구로 지낸 사람인데, 어느 순간부터 그 사람 목소리가 담긴 클립을 유독 오래 붙잡고 있는 저를 봤거든요. 여럿이 놀러 가서 찍은 영상인데, 편집하다 보면 다른 사람은 다 쳐내고 그 사람 웃는 3초만 남기고 있더라고요. 같은 장면을 몇 번씩 돌려보면서, 이게 편집 때문인지 그 사람 때문인지 저도 헷갈렸어요. 친구인 채로 편한데, 이 선을 넘었다가 그마저 잃을까 봐 고백을 못 하고 있었어요. 서른이나 돼서 이런 걸로 재고 있는 게 우습기도 했고요. 남들은 만나면 사귀고 헤어지고 하는데, 저는 시작도 못 하고 몇 달째 제자리걸음이었어요. 솔직히 지금이 편했어요. 굳이 이름 붙이지 않아도 자주 보고, 편하게 웃고, 그거면 됐다 싶었거든요. 근데 그 편함 밑에 자꾸 다른 게 고이는 걸 저도 알고 있었어요. 모른 척 컷만 넘기면서요. 썸 상담을 신청한 건 지금 이 관계가 넘어가도 되는 흐름인지, 아니면 제 착각인지 그거 하나를 알고 싶어서였어요. 괜히 저 혼자 앞서갔다가 3년 우정까지 어색하게 만들까 봐, 확인 없이는 한 발도 못 떼겠더라고요. 선생님이 '두 사람은 이미 서로에게 마음이 기울어 있는 상태인데, 오래된 친구라는 관성 때문에 둘 다 먼저 움직이길 미루는 흐름'이라고 하셨어요. 제 착각이 아니라 상대도 비슷한 자리에 있다는 걸 짚어주신 거예요. 다만 이런 관계는 어설프게 흘리듯 고백하면 도로 친구로 돌아가기 쉬우니, 애매하게 떠보지 말고 분명한 자리에서 진심을 전하라고 하셨어요. 시기도 짚어주셨는데,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붙어 있는 때가 지나 서로 조금 소원해지기 전에 움직이는 게 낫다고요. 관성이 편안함으로 굳어버리면 그땐 더 못 넘는다고 하셨어요. 그 말이 오래 남았어요. 저는 계속 조금만 더 있다가를 반복하고 있었거든요. 편한 게 좋아서라기보다, 지금 이 관계마저 깨질까 봐 겁이 나서 시간을 끌고 있었던 거예요. 고백해서 어색해지느니 친구로라도 남는 게 낫다고, 그렇게 저를 설득하면서요. 근데 그건 지키는 게 아니라 그냥 미루는 거였더라고요. 미룬다고 마음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돌아보면 저는 그 사람이 먼저 움직여주길 은근히 바라며 속으로 서운해하고 있었어요. 나한테 관심 있으면 티를 내주지, 하는 마음이요. 근데 그 사람도 똑같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니, 둘 다 서로 탓하며 멈춰 있었던 거예요. 관성이라는 게 편해서 못 벗어나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겁이 나서 편한 척하고 있었던 거고요. 그걸 아니까 서운함이 스르르 풀렸어요. 아직 고백은 안 했어요. 그런데 이제 적어도 제 마음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미루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건 알아요. 감정이 흐릿할 때 방향을 잡아준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어요. 좋다 싫다를 판정해 주는 게 아니라 제가 왜 못 움직이는지를 짚어주니까 오히려 발이 떨어졌어요. 편집할 때 자꾸 그 사람 웃는 3초에서 손이 멈추던 이유를, 이제는 저도 인정하려고요. 조만간, 어설프게 떠보지 않고 분명한 자리에서 말할 생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