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Archive
감정의 크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어떤 판단 기준이 남았는지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록입니다.
나는 왜 늘 도망가는 사람만 좋아하게 될까. 서른셋이 되도록 이 질문을 못 풀었어요. 다정하고 안정적인 사람은 이상하게 지루하고, 밀당하며 잡히지 않는 사람한테만 마음이 불붙는 게 매번 반복이었거든요. 잘해주는 사람 앞에선 하품이 나고, 애태우는 사람 앞에선 밤을 새우는 제가 저도 이해가 안 됐어요. 세 번째 연애가 또 비슷하게 끝나고 나서, 이번엔 상대를 분석할 게 아니라 저를 분석해야겠다 싶어 프리미엄을 신청했어요. 또 내가 뭔가 잘못한 거겠지, 하는 자책이 습관이 돼 있었어요. 헤어질 때마다 제 어디가 부족했는지부터 세는 게 버릇이었거든요. 이번엔 부족한 데를 세는 대신, 왜 자꾸 같은 사람에게 끌리는지 그 뿌리를 보고 싶었어요. 선생님이 리포트에서 '당신은 쉽게 잡히지 않는 대상을 통해 자기 가치를 확인하는 데 익숙해진 사람'이라고 하셨어요. 어릴 때부터 애정을 얻으려면 애를 써야 했던 환경이, 노력해서 얻는 사랑만 진짜라고 각인시켰다는 거예요. 그래서 가만히 곁을 내주는 안정적인 사람 앞에선 오히려 불안하고 심심하게 느낀다고요. 거저 주는 사랑은 어쩐지 가짜 같아서, 저도 모르게 밀어내고 애태울 상대를 찾아다녔다는 거죠. 이 대목에서 정말 오래 멈춰 있었어요. 제가 회피형한테 끌린 게 취향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익숙한 결핍을 반복하고 있었던 거더라고요. 편한 사람이 지루한 게 아니라, 제 안의 불안이 편안함을 못 견뎠던 거라는 그 한 줄을, 잊어버릴까 봐 캡처해서 잠금화면에 넣어뒀어요. 며칠을 그 문장이 저를 따라다녔어요. 지루함이라 이름 붙였던 감정의 진짜 이름이 사실은 불안이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어요. 편한 사람 앞에서 하품이 났던 게 실은 긴장이 풀려서가 아니라, 긴장할 거리가 없어 견딜 수 없었던 거예요. 그 사실이 부끄러우면서도 이상하게 후련했어요. 더 놀란 건, 선생님이 그걸 결함이라고 몰아세우지 않았다는 거예요. '이건 고장이 아니라 당신이 살아남기 위해 익힌 방식이었으니, 이제 그 방식이 더는 필요 없다는 걸 몸에 알려주면 된다'고 하셨어요. 안정적인 사람한테 느끼는 심심함을 안전함으로 다시 읽는 연습을 하라는 구체적인 방향까지 주셨고요. 저를 고치라는 게 아니라, 이제 그만 안심해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어요. 1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인데도 제 얘기라 한 장도 지루하지 않았어요. 15만원이 아깝지 않았던 건, 다음 상대를 점쳐준 게 아니라 저라는 사람의 설명서를 받은 느낌이라서예요. 이제야 제 연애사가 이해가 돼요. 다음에 안정적인 사람을 만나면, 이번엔 도망가지 않고 그 편안함에 조금 더 머물러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를 탓하러 갔다가, 저를 처음으로 이해하고 돌아왔어요. 결핍을 반복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반복을 이제 멈출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았거든요. 다음 연애는 불붙는 사람이 아니라 곁을 지켜주는 사람과, 좀 심심해도 오래 해보고 싶어요. 심심함이 곧 안전이라는 걸, 이제는 머리로라도 아니까요. 백 마디 위로보다, 내가 왜 이런지를 알게 된 이 한 권이 저한텐 훨씬 컸어요. 다음 상대가 궁금하던 마음이, 이제는 그 사람과 잘 지낼 저 자신이 궁금한 쪽으로 바뀌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