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Archive
감정의 크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어떤 판단 기준이 남았는지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록입니다.
반도체 공정을 다루는 엔지니어예요. 나노 단위의 미세한 오차도 잡아내는 일을 하는데, 정작 제 연애의 오차는 십 년째 못 잡고 있었어요. 남의 불량은 그렇게 잘 걸러내면서 제 것만 못 보는 셈이죠. 서른이 되고 가을을 타면서 문득 무서워졌어요. 나는 왜 매번 나를 밀어내는 사람만 좋아할까. 다정하게 다가오는 사람은 금세 시들해지고, 벽을 세우는 사람한테만 기어이 매달리는 이 패턴이요. 이대로 가면 서른 이후의 연애도 똑같이 흘러갈 것 같아서, 겁이 나서 프리미엄을 신청했어요. 공정에서는 불량이 나면 원인을 끝까지 추적해서 라인을 고치잖아요. 그런데 제 연애는 십 년째 같은 불량이 나는데도, 정작 그 원인 라인을 한 번도 안 들여다봤더라고요. 선생님은 제 구조를 보시더니, 저는 애정이 확실해지면 오히려 긴장이 풀려 흥미를 잃고, 애정이 불확실할 때 그걸 붙잡으려는 몰입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제가 진짜 끌린 건 상대가 아니라 그 불안 자체였다고요. 이 문장에 저도 모르게 밑줄을 그었어요. 십 년 동안 아무도 저를 이렇게 정리해 준 적이 없었거든요. 제 지난 연애들을 하나의 뿌리로 꿰어 설명한 부분도 정확했어요. 나는 매번 다른 사랑을 했다고 믿었는데, 알고 보니 매번 같은 지점에서 넘어지고 있었더라고요. 상대만 바뀌었지 넘어지는 자리는 늘 똑같았던 거예요. 백 페이지가 넘는데 허투루 채운 데가 없었어요. 이제 누군가의 다정함이 시시하게 느껴질 때, 바로 그게 위험 신호라는 걸 기억하기로 했어요. 여태 저는 그 시시함을 이 사람은 매력이 없다는 신호로 읽었는데, 사실은 이 사람은 안전하다는 신호였던 거예요. 검출 기준 자체가 뒤집혀 있었던 셈이죠. 그 한 줄을 아는 것만으로 다음 연애가 조금 덜 무서워졌어요. 십 년 묵은 불량의 원인을 알았으니, 이제 같은 자리에서 넘어지진 않을 거예요. 5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