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Archive
감정의 크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어떤 판단 기준이 남았는지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록입니다.
"그냥, 지쳤어." 3년을 만난 사람이 남긴 마지막 말이 그거였어요. 이유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듯 돌아섰어요. 벌써 석 달 전 일인데 저는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기분이에요. 마흔둘이면 이별에 좀 무뎌질 나이도 됐는데 이번엔 유독 지워지지가 않았어요. 젊을 때 이별은 앞으로 다른 사람이 있겠지 하는 마음이라도 있었는데, 이 나이의 이별은 그런 기대도 옅어서 더 헛헛하더라고요. QA 일을 하며 하루 종일 남의 오류만 잡아내다가, 정작 우리 관계는 어디서 어긋난 건지 아무리 되짚어도 재현이 안 되는 버그 같았어요. 분명 잘 지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지쳤다고 하는데 그 원인을 못 찾으니 미칠 노릇이었어요. 잠이 안 오는 밤이면 지난 대화 로그를 처음부터 다시 읽듯 카톡을 위로 위로 올려보곤 했어요. 그 사람이 마지막으로 읽음 표시만 남기고 답하지 않은 그 말풍선 앞에서 늘 손이 멈췄고요. 낮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 회의에 들어가고 버그 리포트를 썼어요. 그러다 점심시간엔 혼자 빈 회의실에 앉아 몇 분씩 멍하니 있다 나오곤 했어요.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 그 사람이 두고 간 우산이 현관에 그대로 있었어요. 비 오는 날마다 그걸 두고 굳이 다른 우산을 챙겨 나갔어요. 그 우산을 펴는 순간 정말 끝인 것 같아서요. 미련이 별건가요, 우산 하나 못 쓰는 게 미련이더라고요. 재회 상담을 받으며 처음으로 그 지쳤어의 정체를 알게 됐어요. 선생님은 제 얘길 다 들으시고 다르게 짚으셨어요. 올봄부터 번아웃이 심하게 온 시기라 감정을 처리할 여력 자체가 바닥난 상태였다고요. 저를 향한 마음이 식은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감당 못 해 가장 가까운 저부터 놓아버린 거라고 하셨어요. 제가 뭘 잘못해서가 아니었다는 그 한마디에, 석 달을 이 악물고 참아온 게 왈칵 쏟아졌어요. 눈물이 아니라 숨이 먼저 터졌어요. 그동안 숨을 참고 살았다는 걸 그제야 알았어요. 선생님은 지금 연락하면 오히려 부담이 되니 상대의 기운이 회복되는 초겨울까지 기다리라고 하셨어요. 그전까지 제가 할 일은 매달릴 준비가 아니라 저를 추스르는 일이라고요. 매달리고 싶은 마음을 참는 게 사랑을 접는 거라고만 여겼는데, 선생님은 그게 오히려 그 사람을 기다려주는 방식이라고 하셨어요. 조급함에 지금 손을 내밀면 그나마 남은 자리마저 밀어내게 된다고 분명히 짚어주셨고요. 그런데 얼마 전, 예상보다 이르게 그 사람이 제 생일에 짧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어요. 리포트가 말한 회복의 신호가 조금씩 비치기 시작한 것 같아요. 바로 긴 답장을 쓰고 싶은 걸 꾹 눌러 담고, 선생님 말대로 담백하게 고맙다고만 했어요. 예전 같았으면 매달렸을 텐데 이번엔 방향을 아니까 조급하지 않아요. 다시 만나든 아니든, 적어도 제가 버려진 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저는 이 상담이 고마워요. 석 달을 웅크리고 있던 사람을 일으켜 세운 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약속이 아니라,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확인 하나였어요. 그거 하나가 석 달 만에 처음으로 저를 똑바로 걷게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