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Archive
감정의 크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어떤 판단 기준이 남았는지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록입니다.
'우리 조금만 천천히 가면 안 될까.' 결혼 얘기를 꺼낸 다음 날, 그 사람이 남긴 말이에요. 그 한마디 뒤로 조금씩 멀어지더니 결국 정리하자고 하더라고요. 천천히 가자는 말이 사실은 멈추자는 말이었다는 걸, 저는 한참 뒤에야 알았어요. 스물넷에 항공정비 일을 하다 보니 또래보다 결혼 얘기를 이르게 꺼낸 편이긴 했어요. 격납고에서 몇 톤짜리 기체를 매뉴얼대로 하나하나 점검하는 일을 하다 보면, 관계도 순서대로 착착 맞물려 가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거든요. 그래서 그 사람이 도망치듯 떠날 줄은 정말 몰랐어요. 제가 너무 앞서가서 겁을 줬나, 그 생각에 한동안 스스로를 몰아세웠어요. 퇴근하고 유니폼을 벗으면, 종일 멀쩡히 서 있던 다리가 그제야 후들거렸어요. 리포트에서 선생님은 상대가 저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올해가 그 사람한테는 자기 앞가림만으로도 벅찬 시기라고 하셨어요. '이 사람은 지금 누군가에게 미래를 약속하는 것 자체가 겁나는 자리에 있는 거지, 당신을 밀어낸 게 아니다'라고 적혀 있었어요. 그 문장을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읽어봤어요. 활자로만 보던 걸 제 목소리로 들으니까, 조여 있던 게 조금 풀리는 것 같았거든요. 제가 조급하게 굴어서 떠난 줄 알고 자책했는데, 시기의 문제였다는 걸 아니까 이상하게 담담해졌어요. 내가 부족해서 놓친 게 아니라는 것. 그 하나가 며칠을 붙들던 무게를 덜어줬어요. 종일 멀쩡히 서서 일하다가도 퇴근길 지하철에서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지던 게, 그 문장을 읽고부터는 잦아들었어요. 나를 원망하는 밤이 줄어드니 잠도 조금씩 붙더라고요. 무작정 기다리지 말고 연말께 그 사람의 부담이 풀리는 흐름이 올 때 가볍게 안부부터 건네라고 방향을 주셨어요. 그때까지는 저도 제 일에 파묻혀 지내려고요. 아직 다시 만난 것도 아니고 확실한 건 하나도 없지만, 조급하지 않게 됐다는 것. 지금은 그게 제일 큰 수확이에요. 매뉴얼처럼, 이 관계에도 아직 남은 점검 순서가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