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Archive
감정의 크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어떤 판단 기준이 남았는지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록입니다.
응급구조사로 십 년 넘게 일하면 몸으로 확인되는 것만 믿게 돼요. 맥박이 뛰는지, 숨을 쉬는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만요. 그래서 저는 사주 같은 거 잘 안 믿는 편이었어요. 그런데 부모님이 결혼 얘기 오간 사람이랑 궁합 한번 보고 오라고 하도 성화라, 반은 부모님 성의로 신청했어요 ㅋㅋ 기대는 없었어요. 어차피 좋은 말만 늘어놓겠거니 했거든요. 이 나이 되도록 듣기 좋은 소리 들으려고 돈 쓰는 건 좀 아니다 싶기도 했고요. 솔직히 신청해놓고도 괜한 돈 썼다 싶어서 결과지 오기 전까진 별생각이 없었어요. 근데 막상 읽으면서 생각이 뒤집혔어요. 선생님이 저희 둘을 보시더니 '두 사람은 평소엔 잘 맞는데, 위급하거나 급하게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방식이 정반대로 갈린다'고 하셨어요. 이 대목에서 팔에 소름이 돋았어요. 저는 상황이 터지면 일단 몸부터 움직이는 사람이고, 이 사람은 끝까지 따져보고 나서야 움직이는 사람이거든요. 작년에 급하게 이사 결정할 때 딱 이것 때문에 크게 부딪혔어요. 저는 왜 이렇게 굼뜨냐고 답답해했고, 그 사람은 왜 이렇게 앞뒤 없이 지르냐고 했고요. 제가 그 얘길 한 줄도 안 적었는데 그 패턴을 콕 집어내시니까, 거기서부터 자세를 고쳐 앉고 읽었어요. 사실 저는 그때 속으로 이 사람이 좀 답답한 사람인가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거든요. 급할 때 왜 안 움직이나 싶어서요. 현장에서 일 초가 사람 목숨을 가르는 걸 보고 사는 사람이라, 결정 앞에서 뜸 들이는 게 유독 견디기 힘들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그걸 단점으로만 안 보셨어요. 급할 때 한 사람은 밀고 한 사람은 잡아주는 구조라, 규칙만 미리 정해두면 오히려 서로가 큰 실수를 막아주는 조합이라고 하셨어요. 그 말에 원망이 싹 가라앉았어요. 답답한 게 아니라 저를 붙잡아주는 쪽이었구나 싶어서요. 방법도 손에 잡히게 주셨어요. 급한 일이 생기면 각자 3분씩만 생각할 시간을 갖고 그다음에 결정을 합치자, 이런 식으로 미리 약속을 정해두라고요. 몸이 먼저 나가는 저랑 머리가 먼저 도는 그 사람 사이에 그 3분이 완충이 되는 거예요. 막연히 잘 맞는다가 아니라 어디서 부딪히고 그걸 어떻게 막으라는 게 구체적이라 좋았어요. 부모님 성의로 시작했는데 정작 제가 제일 많이 배웠어요 ㅋㅋ 결혼 전에 이 사람이랑 저를 이렇게 객관적으로 나란히 놓고 볼 기회가 또 있을까 싶더라고요. 안 믿던 사람이 이런 후기까지 쓰는 거 보면 저도 좀 웃기지만, 부모님한테도 잘 봤다고 말씀드렸어요. 이제 그 사람이 뜸 들일 때 답답해하는 대신, 아 지금 머리를 굴리는 중이구나 하고 기다려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결혼이라는 게 잘 맞는 사람을 찾는 일인 줄만 알았는데, 안 맞는 지점을 미리 알고 약속을 정해두는 일이라는 걸 이번에 배웠어요. 남은 평생을 같이 살 사람인데 우리가 어디서 부딪히는지를 결혼 전에 알게 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몸으로 먼저 뛰는 저랑 머리로 먼저 재는 그 사람, 그 차이가 이제는 겁나지 않아요. 오히려 급할 때 서로를 붙잡아줄 손이 하나 더 있는 셈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