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Archive
감정의 크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어떤 판단 기준이 남았는지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록입니다.
응급실에서 밤새 뛰고 오면 몸이 걸레짝이 돼요. 손끝까지 진이 다 빠져서 말할 기운도 없고요. 동거하던 여자친구랑은 그 피로 때문에 자주 부딪혔어요. 설거지 누가 하냐, 왜 말도 없이 먼저 자냐, 진짜 별것도 아닌 걸로 시작해서 결국 각자 방을 쓰다가, 어느 날 그녀가 짐을 싸서 나갔어요. 붙잡을 힘도 없이 문 닫히는 소리만 들었어요. 장마철이라 집도 눅눅한데 빈방에 혼자 누워 있으니, 밥맛도 없고 잠도 안 오고 몸이 먼저 이상해지더라고요. 냉장고를 열면 그녀가 사둔 반찬통이 그대로 있어서 그걸 보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 차마 못 버리고 며칠을 그대로 뒀어요. 남자가 무슨 사주냐 싶었지만, 이유라도 알아야 할 것 같았어요. 헤어질 만큼 큰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렇게 끝나는 게 도무지 납득이 안 됐거든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아야 다음이 있든 말든 하잖아요. 선생님이 '두 사람은 안 맞아서 싸운 게 아니라, 둘 다 밖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집에서 푸는 유형이라 같은 공간을 쓰면서 그게 서로한테 튄 구조'라고 하셨어요. 감정이 식은 게 아니라 환경이 문제였다는 거예요. 제 교대근무로 생활 리듬이 뒤죽박죽인 것도 겹쳤고요. 서로가 미운 게 아니라, 각자 지쳐서 집에 들어와 하필 제일 가까운 사람한테 화풀이를 한 거였어요. 원인을 딴 데서 찾고 있었으니 답이 안 나왔던 거죠. 그 말 듣고 그녀한테 연락했어요. 그때 내가 피곤하다는 핑계로 너한테 짜증 낸 거 미안하다고, 딱 그렇게요. 답장이 왔고, 지금 조심스럽게 다시 얘기 중이에요 ㅋㅋ 원인을 아니까 같은 실수는 안 하겠더라고요. 돌이켜보면 저희는 사랑이 부족했던 게 아니라, 둘 다 밖에서 얻어맞고 들어와 지쳐 있을 때 서로를 쉬게 해주는 법을 몰랐던 거예요. 이번엔 몸이 힘들면 힘들다고 말로 하려고요. 방문 쾅 닫는 걸로 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