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Archive
감정의 크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어떤 판단 기준이 남았는지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록입니다.
썸이라는 게 세상에서 제일 애매하잖아요. 사귀는 것도 아니고, 안 만나는 것도 아니고. 그 애매함을 못 견뎌서 상담을 받았어요.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해요. 온종일 반납된 책을 청구기호대로 제자리에 꽂는 게 제 일인데, 정작 이 관계는 어디에 꽂아야 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겉으론 차분하게 라벨 붙이고 서가를 정리하면서, 머릿속으론 그 사람 답장 텀만 계산하고 있었어요. 오늘은 왜 두 시간이나 걸렸지, 어제는 십 분이었는데. 그런 저한테 막연한 위로만 던지는 상담이면 소용없겠다 싶었어요. 근데 선생님은 이 애매함의 정체를 정확히 짚으셨어요. '상대는 마음이 없는 게 아니라 관계에 이름이 붙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이라, 밀어내는 게 아니라 속도를 늦추고 있는 중'이라고요. 제가 밀린다고 느낀 그게 사실은 거절이 아니었던 거예요. 속도가 느린 걸 마음이 없는 걸로 오해하고 저 혼자 상처받고 있었더라고요. 답장 텀을 재던 그 계산이 얼마나 부질없었는지 그제야 알았어요. 그 애매함이 왜 그렇게 저를 힘들게 했는지도 알겠더라고요. 저는 뭐든 제자리가 정해져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이라, 이름표 없는 관계가 반납되고도 어디에도 못 꽂힌 책처럼 계속 신경 쓰였던 거예요. 근데 어떤 관계는 아직 분류하지 않아도 되는 거였어요. 이름을 붙이려고 조바심 낼수록 오히려 그 사람을 몰아세우게 된다는 것도요. 그 한마디로 몇 주째 제자리를 맴돌던 고민이 정리됐어요. 요란한 위로는 없었지만, 저는 그거면 됐어요. 조용히 도움받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