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Archive
감정의 크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어떤 판단 기준이 남았는지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록입니다.
결혼이 무서웠어요. 남들 다 한다는 그 결혼이 왜 저한테만 이렇게 겁이 나는지 몰라서, 서른하나에 큰맘 먹고 프리미엄을 신청했어요. 가을만 되면 이상하게 마음이 축 가라앉는데, 올가을엔 남자친구가 슬슬 결혼 얘기를 꺼내면서 그 두려움이 확 커졌어요. 좋은 사람인데도 결혼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어지는 제가 이상했거든요. 회계사라 숫자로 리스크 계산하는 건 자신 있는데, 정작 제 마음의 리스크는 도무지 계산이 안 되더라고요 ㅋㅋ 15만 원이 적은 돈은 아니라 신청 버튼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어요. 근데 이 두려움을 안은 채로 결혼하는 게 더 큰 비용 같아서 결국 질렀죠. 리포트를 읽는데, 박도사님이 제 두려움의 뿌리를 부모님 이혼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풀어주셨어요. 어릴 때 두 분이 무너지는 걸 지켜본 아이는 결혼을 언젠가 깨질 수 있는 것으로 각인하고, 그래서 좋을수록 더 도망치고 싶어진다고요. 좋은 게 두려운 게 아니라, 좋은 걸 잃을까 봐 미리 겁부터 내는 구조라고 하셨어요. 이 문장에서 왈칵했어요. 제가 딱 그래요. 행복하면 이게 언제 깨지려나 불안부터 앞서는 사람이요. 백 페이지가 넘는데 저를 위로하려고 빈말로 채운 데가 없고, 제 지난 연애들이 왜 다 비슷한 지점에서 끝났는지까지 하나로 꿰어주셨어요. 제가 무의식적으로, 관계가 안정될 만하면 괜히 트집을 잡아 먼저 흔들었다는 것도요. 좋은 게 계속되면 오히려 불안해서, 내 손으로 흔들어 봐야 마음이 놓이던 거예요. 깨질까 봐 무서워서 미리 깨는 사람이었던 거죠. 뜨끔했지만 부정할 수가 없었어요. 앞으로 그 불안이 올라올 때, 그게 진짜 위험 신호가 아니라 오래된 각인일 뿐이라는 걸 구분하는 법도 짚어주셔서, 이제 최소한 도망치기 전에 한 번은 멈춰 설 수 있을 것 같아요. 새벽마다 이혼이며 파혼 관련 글만 검색하던 밤이 좀 줄었어요 ㅋㅋ 5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