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Archive
감정의 크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어떤 판단 기준이 남았는지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록입니다.
병원 검사실에서 수치만 들여다보는 마흔이에요. 숫자와 결과값이 정확한 세계에 오래 있다 보니, 사주 같은 건 늘 반쯤 흘려듣는 사람이었어요. 데이터로 안 나오는 건 잘 안 믿었죠. 그런 제가 리포트를 신청한 건, 소개팅으로 만나 세 달을 잘 만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식어버렸기 때문이에요. 분명 지난주까지 다음 주말 약속을 잡고 웃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답이 느려지고 만남을 미루더라고요. 이유를 물어도 요즘 좀 바쁘다는 말뿐이었고요. 뭘 잘못했나 싶어 지난 대화를 위로 위로 올려가며 복기하는 저 자신이 한심했어요. 어떤 문장에서 온도가 바뀌었는지, 검사지 판독하듯 대화창을 뜯어봤어요. 몇 시 몇 분에 답이 왔고 몇 자였는지까지 표로 정리하고 있는 저를 보면서, 아 내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구나 싶었어요. 손끝이 차갑게 식도록 휴대폰만 쥐고 있던 밤이 며칠이나 이어졌어요. 답장 알림이 뜰 때마다 심장이 철렁하고, 아니면 또 한참 가라앉고요. 선생님이 두 사람 사주를 같이 보시더니, 상대가 6월 들어 일과 관계 양쪽에서 한꺼번에 부담이 몰리는 시기라고 하셨어요. '이 사람은 마음이 식은 게 아니라, 감당할 게 많아지면 가장 편한 관계부터 뒤로 미루는 구조'라고요. 저를 편하게 여겨서 오히려 뒤로 밀린 거라는 말이 묘하게 위로가 됐어요. 미움받아 밀려난 게 아니라는 것. 그 하나를 아는 것만으로도, 며칠을 붙들고 있던 자책이 한결 가벼워졌어요. 제가 만만해서가 아니라, 제 앞에서만은 애쓰지 않아도 되니까 잠깐 미뤄둔 거였어요. 그 말이 어찌나 위로가 되던지, 며칠 만에 처음으로 밥이 넘어갔어요. 그리고 7월 중순쯤 상대의 숨통이 트이면서 먼저 연락이 올 수 있으니, 그전까지는 재촉하지 말고 담담하게 지내라고 하셨어요. 솔직히 설마 했어요. 제가 다루는 검사 수치처럼 딱 떨어지는 세계가 아니니까요.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다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쓰고 싶던 연락을 꾹 참았어요. 그런데 정말 7월 셋째 주에, 그 사람한테서 '요즘 정신없어서 미안했다'는 연락이 왔어요. 그 문자를 받고 한동안 화면만 바라봤어요. 매달렸으면 오히려 더 밀어냈을 텐데, 기다리라는 방향을 알고 있어서 조급하게 굴지 않을 수 있었거든요. 그 며칠 동안 연락하고 싶은 손을 몇 번이나 도로 내려놓았는지 몰라요. 방향을 몰랐다면 결코 못 참았을 거예요. 참는다는 게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어서 하는 일일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지금은 다시 조심스럽게 만남을 이어가는 중이에요. 아직 완전히 예전으로 돌아간 건 아니에요. 그래도 제가 뭘 잘못해서가 아니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 이 값은 다 했다고 생각해요. 수치를 다루는 일을 하는 제가 이런 후기를 쓰게 될 줄은 정말 몰랐네요. 세상엔 검사지로는 안 잡히는 흐름이라는 것도 있더라고요. 데이터만 믿던 제가 이번만큼은 그 흐름 하나에 기대어 며칠을 버텼고, 결국 그게 맞았어요. 사람 마음에도 조수처럼 밀물과 썰물이 있다는 걸, 마흔에야 배웁니다. 급하게 굴어 밀어냈다면 지금쯤 저는 또 대화창만 붙들고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었겠죠. 기다릴 줄 아는 것도 사랑의 한 방식이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