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Archive
감정의 크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어떤 판단 기준이 남았는지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록입니다.
고백하자면, 저는 늘 저에게 무심한 사람만 좋아했습니다. 이번에도, 그 전에도, 그 전전에도요. 서른일곱이 되도록 같은 자리에서 똑같이 넘어지는 게 이상해서, 프리미엄을 신청했습니다. 공무원으로 십 년 넘게 한자리에서 일했습니다. 성실하다는 말은 지겹도록 들었는데, 연애만은 늘 같은 방식으로 실패했습니다. 다정한 사람은 이상하게 시시하게 느껴지고, 저를 애타게 하는 사람에게만 마음이 갔습니다. 그런 사람을 만날 때면 답장 하나를 기다리느라 저녁밥이 목으로 안 넘어갔고, 뒤척이다 새 아침을 맞은 날도 많았습니다. 몸이 먼저 지쳐가는데도 저는 그걸 사랑이라 불렀습니다. 왜 그런지 저도 몰랐습니다. 리포트는 그 이유를 저보다 먼저 알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제 구조를 보시더니, 어릴 때 애정을 늘 노력해서 얻어야 했던 사람은 쉽게 주어지는 애정을 가짜로 느끼고, 애써 얻어내야 하는 애정만 진짜로 착각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무심한 사람에게 끌리는 건 제 취향이 아니라 오래된 상처의 반복이라고요. 담담하게 적힌 문장인데 오래 들여다봤습니다. 페이지를 넘기지도 못하고요. 특히 제 지난 연애 세 번의 패턴을 하나의 뿌리로 꿰어 설명한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매번 다른 사람을 만났다고 믿었는데, 리포트는 제가 매번 같은 사람을 골라왔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얼굴도 직업도 다 다른 세 사람이었는데, 제가 그들에게 매달리던 방식은 무섭도록 똑같았다는 겁니다. 늘 먼저 연락하고, 늘 더 좋아하고, 늘 확인받지 못해 초조해했지요. 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인데, 저를 위로하려고 채운 문장이 한 줄도 없었습니다. 대신 저를 아주 정확하게 해부해 놓았습니다. 앞으로의 흐름에 대한 부분도 좋았습니다. 이 패턴을 알아챈 것만으로 이미 절반은 풀린 것이고, 다음에 누군가의 다정함이 시시하게 느껴질 때 바로 그게 신호라는 걸 기억하라는 조언이 실용적이었습니다. 시시함이 곧 위험이라는 걸, 이제 저는 압니다. 여태 저는 그 시시함을 이 사람은 아니다라는 신호로 읽었는데, 알고 보니 그건 이 사람은 안전하다라는 신호였던 겁니다. 신호를 거꾸로 읽으며 십 년을 넘어진 셈이지요. 오래 방치했던 방을 정리하고 나면 버릴 것과 남길 것이 비로소 보이잖아요. 이 리포트가 제게 딱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그동안은 제 마음이라는 방에 뭐가 왜 쌓여 있는지도 모른 채, 문만 닫아두고 살았던 셈이지요. 이제는 적어도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는 압니다. 크게 울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몇 년을 어질러 둔 방을 조용히 정리한 기분이었습니다. 서른일곱이 되도록 왜 같은 자리에서 넘어지는지 몰라 스스로를 한심해하던 시간이 길었는데, 이제는 그게 제 잘못이 아니라 오래된 상처가 시킨 일이었다는 걸 압니다. 저를 탓하는 대신 저를 이해하게 된 것, 그게 십오만 원으로 산 가장 큰 소득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값이 비싸다 하겠지만, 십 년 반복한 실패의 원인을 아는 값이라면 저는 아깝지 않았습니다. 다음 연애에서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 이제는 압니다. 조용히, 다섯 개의 별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