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Archive
감정의 크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어떤 판단 기준이 남았는지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록입니다.
점심시간에 다 같이 나선 단풍 구경 길에서, 그 사람이 유독 제 옆으로만 걷는 걸 느꼈어요. 우연이라기엔 몇 번이나 반복됐고, 제가 걸음을 늦추면 그 사람도 슬며시 속도를 맞추더라고요. 같은 팀 사람이라 마음을 두는 게 조심스러웠어요. 사내연애가 잘못되면 회사 생활 전체가 불편해지니까요. 사실 저는 예전에 회사에서 마음을 티 냈다가 크게 데인 적이 있어요. 그 뒤로는 직장에서 누굴 좋아하는 게 겁부터 났어요. 이번에도 그 기억 때문에, 좋아하는 마음보다 도망칠 궁리를 먼저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 기류가 진짜인지, 저 혼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아닌지부터 확인하고 싶어 썸 상담을 받았어요. 솔직히 좋게 좋게 말해주고 끝나는 거 아닐까 하는 의심도 있었고요. 그런데 선생님은 무작정 잘될 거라 하지 않으셨어요. 상대가 호감은 분명하나 티를 잘 내지 않는 신중한 구조라, 먼저 확 다가가기보다 업무 외의 가벼운 접점을 늘리며 상대가 편하게 다가올 여지를 주라고 하셨어요. 여기서 제가 조급하게 굴면 오히려 상대가 부담을 느껴 물러설 사람이라고요. 제가 예전에 밀어붙이다 관계를 망친 그 순간들이 겹쳐 보여서, 제 성격을 아는 사람처럼 콕 짚으시는 게 조금 놀라웠어요. 그 조언대로 가을 나들이 자리에서 편하게 대했더니, 며칠 뒤 그 사람이 다음엔 둘이 전시회나 가자고 먼저 말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자리에서 표정 관리를 하느라 애먹었어요. 몇 주를 혼자 끙끙대던 게 무색하게, 방향을 잡고 나니 관계가 저절로 풀리기 시작했어요. 혼자 재던 신호가 착각이 아니었구나 싶어 그제야 마음이 놓였어요. 조급함을 내려놓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몰랐는데, 방향을 아니까 그 기다림이 불안이 아니라 조용한 설렘이 되더라고요. 확신은 상대가 주는 게 아니라, 제가 한 발 물러설 때 오히려 다가오는 거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