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Archive
감정의 크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어떤 판단 기준이 남았는지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록입니다.
예전에 재회 상담을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때 도움을 많이 받아서, 이번엔 전혀 다른 고민으로 다시 신청했어요. 연애가 아니라 진로 문제였어요. 서른셋에 저는 지금 다니던 곳을 그만두고 대학원에 갈지, 아니면 이 경력을 살려 다른 회사로 옮길지를 두고 반년을 저울질했어요. 주변에 물어보면 다들 자기 얘기만 해요. 안정적인 게 최고라는 사람, 나이 더 들기 전에 공부하라는 사람. 결국 결정은 제 몫인데, 저는 제가 뭘 원하는지조차 헷갈리는 상태였어요.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도 아무것도 못 정하고 하루가 가겠구나 싶어서, 이불 속에서 한참을 못 일어난 날이 많았어요. 반년이라는 시간이 사람을 얼마나 무기력하게 만드는지, 그걸 겪어본 사람은 알 거예요. 아침마다 오늘은 결정해야지 다짐하고, 저녁이 되면 또 아무것도 못 정한 채 하루를 흘려보내고. 그렇게 제자리를 맴도는 사이 통장 잔고는 줄고, 나이는 한 살 더 먹고요. 이러다 아무 데도 못 가고 여기 이대로 굳어버리는 건 아닐까, 그 생각이 제일 무서웠어요. 부모님한테도 차마 말을 못 했어요. 다 큰 딸이 아직도 진로를 못 정해 헤맨다는 걸 알면 걱정하실 게 뻔하니까요. 그래서 이 무거운 저울질을 오롯이 혼자 지고 있었어요. 박도사 사주 문답이라는 게 있길래, 연애 말고 이런 것도 봐주시나 싶어서 자유 질문 세 개를 적어 넣었어요. 진학과 취업 중 어느 쪽이 제 흐름에 맞는지, 만약 옮긴다면 언제가 좋은지, 그리고 제가 왜 이렇게 결정을 못 내리고 있는지요. 솔직히 큰 기대는 안 했어요. 사주로 진로를 어떻게 알겠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리포트를 읽으면서 그 생각이 슬며시 접혔어요. 선생님은 제가 지금 무언가를 새로 배우고 쌓는 기운이 강해지는 시기에 들어가 있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당장의 안정보다는, 몇 년 뒤를 보고 실력을 축적하는 선택이 제 결에 더 맞는다고요. 다만 무작정 올해 안에 서두르기보다는, 내년 봄 무렵에 방향을 정하고 움직이는 게 흐름을 타는 거라고 시기까지 짚어주셨어요. 월별로 언제 결정을 내리고 언제 실행에 옮기면 좋은지가 달력처럼 정리돼 있어서, 그게 제일 실용적이었어요. 제가 놀란 건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었어요. 제가 왜 이렇게 결정을 못 하냐고 물었는데, 선생님은 제가 우유부단한 게 아니라 한 번 정하면 끝까지 책임지려는 기질이 강해서 오히려 시작 앞에서 신중해지는 사람이라고 하셨어요. '당신은 못 고르는 게 아니라, 아무렇게나 고르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이 한 줄을 저는 다이어리 맨 앞장에 옮겨 적었어요. 늘 제 신중함을 결점이라고만 여겼는데, 그게 갑자기 다르게 보였거든요. 두 번째로 옮긴다면 언제가 좋냐는 질문에도, 그냥 좋은 때를 찍어주는 게 아니라 왜 그 시기여야 하는지를 풀어주셨어요. 제가 연초에는 마음이 급해서 판단이 흐려지기 쉬운 흐름이라, 그때 큰 결정을 내리면 나중에 후회할 확률이 높다고요. 대신 봄이 지나면서 생각이 차분하게 정리되는 시기가 오니, 그때 움직이면 실수가 준다고 하셨어요. 제가 실제로 연초마다 충동적으로 일을 벌였다가 수습하느라 애먹은 적이 많거든요. 제 패턴을 이렇게 정확히 읽는다는 게 얼떨떨했어요. 예전에 연애 상담을 받았을 때도 그랬지만, 이 사람은 좋은 말로 위로하는 게 아니라 제가 저를 오해하고 있던 지점을 바로잡아 준다는 느낌이었어요. 이번에도 그랬고요. 사실 저는 이 나이 먹도록 진로 하나 못 정하고 헤매는 제가 창피했어요. 남들은 다 자리를 잡았는데 저만 뒤처진 것 같고요. 명절에 친척들이 요즘 뭐 하냐고 물으면,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얼버무리는 게 제일 곤욕이었어요. 그런데 이건 뒤처진 게 아니라 제가 신중한 사람이라 그런 거라는 말을 들으니까, 오래 짊어지고 있던 자책이 한결 가벼워졌어요. 어쩌면 이 리포트에서 제일 크게 받은 건 진로 답이 아니라 그거였는지도 몰라요. 지금은 마음을 대학원 쪽으로 거의 기울였어요. 물론 최종 결정은 내년 봄에 다시 점검하면서 내리겠지만, 적어도 반년을 끌던 저울질이 끝났다는 것만으로도 후련해요. 저울질을 끝내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오래 미뤄둔 잠을 실컷 잔 거였어요. 결정을 못 내린다는 죄책감에 짓눌려 있을 땐 자도 잔 것 같지 않았는데, 방향이 생기니까 몸이 먼저 풀리더라고요. 신중함이 결점이 아니라 저를 이루는 결이라는 그 한 문장이, 다이어리 앞장에서 매일 아침 저를 다독여요. 남들 속도에 저를 자꾸 대보던 버릇도 조금은 내려놨고요. 혹시 저처럼 인생의 갈림길에서 남들 말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분이 있다면요. 정답을 대신 골라주는 곳은 아니에요. 다만 내가 어떤 결로 된 사람이고, 어느 시기에 움직이는 게 나한테 맞는지를 알면, 그 선택이 훨씬 덜 무서워져요. 저는 그걸 얻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