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Archive
감정의 크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어떤 판단 기준이 남았는지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록입니다.
응급실에서 밤을 새우고 아침에 퇴근하면, 남들 출근하는 거리를 저 혼자 거꾸로 걸어 집에 와요. 그런 생활을 몇 년째 하다 보면 시간 감각이 좀 이상해지는데, 그 사람과 헤어진 뒤로는 그 뒤집힌 하루가 유독 더디게 늘어졌어요. 남의 심장은 그렇게 살려내면서, 정작 제 마음 하나는 어떻게 손을 못 대겠더라고요. 그 사람은 이직 준비를 이유로 저와 헤어졌어요. 지금은 자기 앞가림이 먼저라, 누구를 만날 여유가 없다고요. 처음엔 그게 핑계로만 들렸어요. 나를 안 좋아하니까 저런 말로 포장하는 거겠지 싶었고요. 서른여섯이나 돼서 이별 하나에 이렇게 휘청이는 제가 낯설기도 했어요. 퇴근길에 그 사람이 좋아하던 국밥집 앞을 지나는데 발이 저절로 멈춰서, 한참을 그 간판만 보다 온 날도 있었어요. 재회 상담을 신청한 건, 솔직히 그 사람이 정말 저를 안 좋아해서 떠난 건지 그것만이라도 확인하고 싶어서였어요. 결과지를 받아 읽고 저는 좀 조용해졌어요. 선생님은 그 사람이 지금 인생에서 한 가지밖에 담지 못하는 시기에 들어가 있다고 하셨어요. 원래 여러 개를 동시에 굴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에 꽂히면 나머지를 다 밀어내야 겨우 버티는 기질인데, 하필 그게 지금은 일과 시험이라는 거예요. '이 사람은 당신을 밀어낸 게 아니라, 지금 자기 그릇에 당신을 담을 자리를 못 만들고 있는 것뿐이에요.' 이 문장이 오래 남았어요. 제가 놀란 건 그다음이었어요. 저는 신청서에 그 사람 성격을 좋게만 적었거든요. 그런데 선생님은 이 사람이 평소에 애정 표현이 서툴고, 힘들 때 오히려 연락을 뚝 끊고 혼자 동굴로 들어가는 사람이지 않냐고 되물으셨어요. 제가 한 번도 쓴 적 없는 얘기였는데, 저희 관계에서 제일 지치던 지점을 정확히 짚으셨어요. 그 사람은 힘들면 사라지고, 저는 그 침묵 앞에서 늘 안절부절못했거든요. 그리고 시기를 말씀해 주셨어요. 그 사람 시험이 끝나고 마음에 한 칸이 비는 시기가 늦가을쯤 오는데, 그전에 무리해서 연락하면 오히려 부담이 되니, 그때까진 제 리듬을 회복하는 데 쓰라고요. 막연히 기다리라는 게 아니라, 기다리는 동안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가 적혀 있어서 그 시간이 덜 막막했어요. 처음엔 반신반의했어요. 시기를 말해줘도 그게 맞겠냐는 의심이 컸거든요. 그런데 얼마 전에 그 사람이 SNS에 시험 관련 글을 하나 올린 걸 봤어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 흐름이 실제로 그 사람 삶에서 지나가고 있다는 게 눈에 보이니까, 조급함이 한 겹 가라앉았어요. 솔직히 그전까지 저는 밤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새벽마다, 카톡 목록에서 그 사람 이름을 눌렀다 지웠다만 반복했어요. 보낼 말을 백 번 썼다가 다 지웠고요. 그런데 이제는 그 손이 좀 잠잠해졌어요. 지금 연락하는 게 왜 역효과인지, 그러면 언제가 맞는지를 아니까, 밤에 핸드폰을 붙들고 있는 시간이 눈에 띄게 줄었거든요. 저한테는 그게 제일 큰 변화예요. 이건 좀 다른 얘긴데, 결과지를 읽으면서 저 자신에 대한 대목이 뜻밖에 아팠어요. 선생님이, 저는 남을 돌보는 일에는 저를 다 쏟으면서 정작 제 감정은 늘 뒤로 미루는 사람이라, 이별 앞에서 유독 저를 몰아세운다고 짚으셨거든요. 직업이 직업이라 그런지 그 말이 뼈아프게 맞았어요. 남 앞에선 그렇게 침착한 사람이, 왜 제 슬픔한테는 그렇게 매정했는지 이제 좀 알 것 같아요. 그렇게 마음이 좀 놓이고 나서야, 그동안 제가 얼마나 저를 방치했는지 보이더라고요. 남의 생명 앞에서는 1초를 아껴 뛰면서, 정작 제 끼니는 며칠씩 걸렀고 잠은 두세 시간이 고작이었어요. 이별을 핑계로 저를 벌주고 있었던 거예요. 리포트를 덮고, 오랜만에 제대로 된 밥을 차려 먹었어요. 별것 아닌데 그게 그렇게 눈물이 났어요. 나부터 좀 살고 봐야, 그 사람이 돌아올 자리도 남는 거잖아요. 선생님이 남긴 말 중에 제일 오래 붙잡고 있는 문장은 따로 있어요. 지금 이 기다림은 그 사람을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시간이라는 말이요. 그 말을 되뇌면, 손 놓고 매달리던 마음이 조금은 제 발로 서게 되더라고요. 아직 재회한 건 아니에요. 늦가을은 오지도 않았고요. 그런데 저는 지금 그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기다릴 수 있게 됐어요. 그게 이 상담에서 제가 얻은 제일 큰 거예요. 그리고 저는 요즘, 남을 살리느라 바빠서 늘 뒷전이던 저를 조금씩 챙기고 있어요. 그게 이 기다림의 진짜 수확일지도 몰라요. 돌아올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돌아왔을 때 초라하지 않을 저를 위해서요. 혹시 저처럼 상대가 자기 사정을 이유로 떠나서, 그게 진심인지 핑계인지 몰라 밤을 지새우는 분이 있다면요. 적어도 그 사람 삶에 지금 어떤 계절이 지나는 중인지는 한번 들여다보셨으면 해요. 원망만 하던 마음이 조금은 다르게 놓이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