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Archive
감정의 크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어떤 판단 기준이 남았는지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록입니다.
마흔셋, 재혼 3년 차입니다. 전 남편 사이에 초등학교 5학년 딸이 있고, 현 남편은 초혼이에요. 재혼할 때 남편이 제 딸을 자기 아이처럼 키우겠다고 했어요. 그 말을 믿었어요. 처음 1년은 정말 좋았어요. 남편이 딸한테 학교 다녀왔어? 물어봐주고, 주말에 놀이공원 데려가주고, 생일에 케이크도 직접 골라줬어요. 딸도 새 아빠한테 잘 따르면서 웃는 날이 많아졌어요. 처음으로 우리가 가족이 될 수 있겠다 싶었어요. 문제는 2년 차부터였어요. 딸이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모든 게 변했어요. 말투가 거칠어지고, 방문을 닫아걸고, 밥 먹으라고 해도 싫다고 소리 지르고. 사춘기 아이들이 다 그렇다지만 남편에게는 충격이었나 봐요. 1년 동안 공들인 관계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 같았을 거예요. 처음에는 참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딸이 "아저씨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야" 라고 한 순간, 남편의 뭔가가 끊어졌어요. 그날부터 남편이 딸한테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어요. 숙제 안 했다고 소리 지르고, TV 보고 있으면 꺼버리고. 저한테도 화살이 돌아왔어요. "네가 제대로 안 가르쳐서 이 모양이다", "원래 아빠가 있는 애가 이렇게 버릇없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 딱 끊어지는 소리가 났어요. 이 사람이 내 딸을 '네 애'로 구분했어요. 자기 아이처럼 키우겠다던 사람이. 그 말을 들은 밤에 잠이 오지 않았어요. 거실에서 남편 코고는 소리가 들리는데 저는 딸 방문 앞에 서 있었어요.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불빛을 보면서 이 아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울고 있는 건 아닌지, 핸드폰으로 친아빠한테 연락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했어요. 첫 번째 결혼이 실패했을 때 이 아이한테 약속했어요. 엄마가 반드시 행복하게 해줄게. 그 약속을 지키고 있는 건지 자신이 없어졌어요. 가장 힘들었던 밤이 있어요. 남편이 딸한테 크게 소리를 질렀고 딸이 울면서 자기 방에 들어갔어요. 저는 남편한테 "그러면 안 된다"고 말했고, 남편은 "항상 딸 편만 든다"며 거실에서 잠을 잤어요. 저는 딸 방에 갔어요.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가슴이 찢어졌어요. "엄마 미안해, 엄마가 결혼을 안 했으면 이런 일 없었을 텐데" 하고 속으로 울었어요. 이 아이한테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엄마 아빠가 이혼하고, 새 아빠가 생기고, 모든 변화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 건데. 그 아이한테 버릇없다고 소리 지르는 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일이에요. 딸이 울다가 잠든 후에 이불을 덮어주면서 땀에 젖은 이마를 닦아줬어요. 자면서도 미간을 찡그리고 있는 아이의 얼굴이 너무 작아 보였어요. 열한 살이에요. 열한 살짜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거예요. 이 아이의 세계에서 안전한 곳이 어디인지, 진짜 편하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있기는 한 건지. 그 생각을 하니까 엄마로서 실격이라는 자괴감이 온몸을 짓눌렀어요. 남편과 딸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어요. 딸은 남편을 피하기 시작했고, 남편은 딸에게 무관심해졌어요. 식탁에 셋이 앉아있는데 말이 없어요. 포크 소리만 나는 저녁 식사가 매일이에요. 가끔 딸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려다가 남편 눈치를 보고 입을 다물어요. 그 순간이 칼로 베이는 것보다 아파요. 이 아이가 자기 집에서 눈치를 봐야 하다니. 저는 그 침묵 속에서 매일 두 쪽으로 찢어져요. 딸 편을 들면 남편이 상처받고, 남편 편을 들면 딸의 눈에서 배신감이 보여요. 어느 쪽을 택해도 누군가를 잃어요. 상담을 신청한 건 이 가정이 유지될 수 있는 건지, 아니면 딸을 위해 다시 나와야 하는 건지 판단이 필요했어요. 두 번째 이혼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았어요. 한 번 실패한 사람이 또 실패하면 그건 운이 아니라 내 문제잖아요. 그 생각이 저를 짓눌렀어요. 나는 가정을 만들 수 없는 사람인가. 내가 만지는 관계는 다 무너지는 건가. 밤마다 천장을 보면서 이 질문이 머리를 맴돌았어요. 새벽 4시에 눈이 떠져서 부엌에 가서 물을 마시는데 냉장고에 딸이 그린 그림이 붙어있었어요. 우리 셋이 손잡고 웃고 있는 그림. 1년 전에 그린 건데 아직 붙어있는 거예요. 그 그림을 보면서 서서 울었어요. 선생님이 세 사람의 사주를 각각 분석해주셨어요. 남편은 원래 아이를 좋아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인데, 혈연이 아닌 자녀와의 관계에서 어떤 거리를 잡아야 하는지 경험이 없어서 서투른 거라고요. 소리를 지른 건 딸이 미워서가 아니라 '아빠 역할'을 잘 못하고 있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좌절감이 폭발한 거래요. 자기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아저씨일 뿐이라는 무력감. 딸의 사주를 보시면서 지금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고 하셨어요. 친아빠와 새 아빠 사이에서 누구를 아빠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엄마의 사랑을 새 아빠에게 빼앗기는 건 아닌지, 사춘기 감정과 가정 환경 변화가 겹치면서 아이도 나름대로 혼란의 한복판에 있다고. "아저씨가 뭔데"라는 말은 공격이 아니라 도움 요청의 다른 형태래요. 이 시기에 아이가 제일 필요한 건 무조건적인 안전감, 무슨 말을 해도 엄마가 내 편이라는 확신이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제 사주를 보시면서 가장 중요한 말씀을 해주셨어요. 중간자 역할을 그만두라고. 남편과 딸의 관계는 그 두 사람이 직접 쌓아야 하는 건데, 제가 계속 사이에서 통역해주면 오히려 직접 소통이 안 된다고. 대신 남편과 딸이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기회를 만들어주되, 그 결과에 개입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실패해도 괜찮으니까 두 사람이 서로를 직접 알아가게 놔두라고. 가장 위로가 됐던 건 이 가정이 충분히 회복 가능하다는 말씀이었어요. 올해 하반기에 남편에게 성장의 기운이 들어오면서 스스로 변화하려는 노력을 할 거래요. 제가 할 일은 그 변화를 지켜보면서 인정해주고, 딸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안전망이 되어주는 거라고. 그리고 두 번째 결혼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첫 번째 이혼은 제 잘못이 아니었고, 지금 이 갈등도 실패가 아니라 세 사람이 진짜 가족이 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과정이라고요. 그 말에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상담 받고 나서 먼저 딸한테 말했어요. "엄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네 편이야. 그건 절대 변하지 않아." 딸이 저를 올려다보면서 눈이 빨개지더니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리고 남편한테도 솔직하게 말했어요. "당신이 힘든 거 알아. 아빠 역할이 어려운 거 알아. 그런데 소리는 지르면 안 돼. 우리 같이 방법을 찾자." 남편이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있다가 "나도 알아, 미안해" 하더라고요. 그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어요. 일주일 후에 남편한테 딸과 둘이 아이스크림 먹고 오라고 보냈어요. 남편이 어색해하면서도 나갔어요. 한 시간 후에 사진이 왔는데 둘 다 웃고 있더라고요. 딸이 민트초코를 먹으면서 새 아빠한테 "이거 맛없다면서요? 한번 드셔봐요" 하는 사진. 남편이 찡그린 얼굴로 먹는 척하는 사진. 그 사진을 보면서 혼자 한참을 울었어요. 이번에는 슬퍼서가 아니라 희망이 보여서. 작은 시작이에요. 이 가정이 완벽해질 수 있다는 환상은 없어요. 하지만 세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알아가면서 우리만의 가족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은 생겼어요. 냉장고에 붙어있는 그 그림, 세 사람이 손잡고 웃는 그 그림이 언젠가 현실이 될 수 있다고 믿어요. 이 상담이 저한테 준 건 정답이 아니라 방향이었고, 지금 제일 필요한 건 정답이 아니라 방향이었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