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Archive
감정의 크기보다 실제로 무엇이 정리되었는지, 어떤 판단 기준이 남았는지를 중심으로 남겨진 기록입니다.
이 후기를 쓰겠다고 마음먹은 건 지난주인데, 막상 쓰려니까 첫 문장이 안 나와서 일주일을 미뤘어요. 제 이야기가 좀 어두울 수 있는데, 그래도 비슷한 상황에 계신 분이 있다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적어봅니다. 저는 올해 스물아홉인 여자예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빠가 외도를 했어요. 엄마가 아빠 핸드폰을 보고 거실에서 소리를 지르던 그 밤을 아직도 기억해요. 저는 방문 틈 사이로 엄마가 우는 걸 봤어요. 열한 살짜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이불을 뒤집어쓰고 귀를 막았는데 소리가 이불을 뚫고 들어왔어요. 그 뒤로 집 안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엄마는 아빠한테 말을 안 했고 아빠는 점점 집에 안 들어왔어요. 중학교 1학년 때 이혼했어요. 엄마가 '아빠는 나쁜 사람이야'라고 한 건 딱 한 번인데 그 한 번이 제 안에 영원히 남았어요. 남자는 결국 떠난다. 믿으면 배신당한다. 사랑이라는 건 끝이 정해져 있다. 열세 살짜리가 내린 결론인데 스물아홉이 된 지금까지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어요. 연애를 안 한 건 아니에요. 대학교 때 한 번, 사회 나와서 한 번. 근데 둘 다 3개월을 못 넘겼어요. 상대가 좋아해줄수록 불안해지는 거예요. '이 사람도 결국은 떠날 거야'라는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멈추지를 않아요. 그래서 먼저 밀어내요. 떠나기 전에 내가 먼저 끝내면 덜 아프니까. 사귀다가 갑자기 '나 이거 못 하겠어'하고 끊어버리고 울면서 후회하고. 이걸 두 번 반복하니까 저도 알겠더라고요. 문제는 상대가 아니라 저라는 걸. 2년 전에 지금 남자친구를 만났어요. 회사 프로젝트에서 같이 일하게 됐는데 처음엔 관심 없었어요. 근데 이 사람이 좀 특이했어요. 제가 벽을 쳐도 화를 안 내요. '아 그래? 알겠어'하고 살짝 물러났다가 며칠 뒤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커피를 건네는 거예요. 밀어내는 데 지치지가 않는 사람이에요. 6개월쯤 됐을 때 결국 제가 졌어요. 아니, 포기한 게 맞을 것 같아요. 밀어내는 걸 포기하고 이 사람을 받아들이기로 한 거예요. 그때부터 사귀기 시작해서 지금 1년 반이에요. 제 인생에서 가장 긴 연애예요. 근데 문제는 여전히 무서워요. 자고 일어나면 '오늘 이 사람이 떠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요. 그 사람이 야근한다고 하면 '진짜 야근이야?'라는 의심이 올라와요. 머리로는 이 사람이 그런 사람 아니라는 걸 아는데 가슴이 안 믿어요. 아빠가 만들어놓은 공포가 제 연애를 잠식하고 있는 거예요. 남자친구가 점점 지치는 게 보여요. '내가 뭘 더 해줘야 네가 나를 믿어?'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 말 듣는 순간 죄책감에 미치는 줄 알았어요. 이대로 가면 이 사람도 떠나겠구나. 그게 아빠 때문이 아니라 내 때문이라는 걸 이제는 알겠는데 고치는 법을 모르겠어서 박도사에 프리미엄 상담을 넣었어요. 그냥 궁합이 아니라 제 근본적인 구조를 보고 싶었거든요. 결과지가 100페이지가 넘었어요. 금요일 밤에 받아서 일요일 아침까지 두 번 읽었어요. 선생님이 제 사주를 보시면서 이런 문장을 쓰셨어요. '이 사주에는 어린 시절에 형성된 깊은 불신의 구조가 있습니다. 이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보호받아야 할 시기에 보호받지 못한 아이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만든 벽입니다. 다만 그 벽이 지금은 당신을 지키는 게 아니라 가두고 있습니다.' 읽는데 눈물이 멈추질 않았어요. 열한 살 때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던 저한테 누군가가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처음으로 말해준 느낌이었어요. 20년 가까이 혼자 안고 있었던 건데. 남자친구 사주도 자세히 분석해 주셨어요. 이 사람이 왜 제 벽 앞에서 지치지 않는지 구조적으로 설명이 돼 있었어요. 원래 '상대의 상처를 자기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는 건강한 경계'를 가진 사주래요. 그래서 제가 밀어내도 상처를 받기보다는 '아, 지금 이 사람이 힘든 거구나'로 처리할 수 있는 거래요. 그게 무심한 게 아니라 이 사람만의 사랑 방식이라고요. 그리고 선생님이 '부모의 관계가 자녀의 연애를 결정하지 않습니다'라고 쓰셨어요. 아빠의 외도는 아빠의 이야기이지 제 이야기가 아니래요. 제 사주에서 보이는 인연 구조는 아빠의 패턴과 완전히 다르고, 지금 만나고 있는 이 사람과의 궁합은 '서로 다른 속도로 치유하면서 함께 걸어가는 구조'래요. 가장 마음에 남은 건 이 문장이에요. '당신이 두려워하는 건 이 사람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열한 살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더 이상 열한 살이 아닙니다. 이불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던 그 아이가 아니라 직접 문을 열고 나갈 수 있는 어른이 된 겁니다.' 이 부분을 읽고 한참을 울었어요. 그리고 나서 남자친구한테 전화했어요. 지금까지 한 번도 하지 못했던 말을 했어요. '내가 널 못 믿는 건 네 때문이 아니야. 나한테 오래된 상처가 있어서 그래. 근데 고치려고 노력할게. 기다려줘서 고마워.' 그 사람이 한참 동안 아무 말 없다가 '알고 있었어. 괜찮아'라고 했어요. 2년간 한 번도 왜 그러냐고 추궁하지 않고 그냥 옆에 있어준 사람이에요. 아직 다 나은 건 아니에요. 여전히 아침에 눈 뜨면 불안한 날이 있어요. 근데 달라진 게 하나 있어요. 예전에는 그 불안이 '이 사람이 떠날 거야'였는데 지금은 '이 불안은 내 안의 열한 살이 보내는 신호야'로 바뀌었어요. 원인을 알면 대처가 되더라고요. 프리미엄 상담 가격이 부담이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이에요. 한 달 생활비의 꽤 많은 비중이거든요. 근데 20년간 짊어진 짐의 정체를 알게 된 거라 그 이상의 가치가 있었어요. 심리상담이랑은 또 다른 접근이에요. 심리상담은 '왜 그런지'를 파는 거고 사주 상담은 '이 구조가 원래 이렇다'를 보여주는 거라서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내 잘못이 아니라 구조라는 게 위로가 되더라고요. 혹시 저처럼 부모님의 이야기가 내 연애를 잠식하고 있다고 느끼시는 분이 계시다면 말씀드리고 싶어요. 부모님의 결말이 당신의 결말이 되는 건 아니에요. 저도 아직 그걸 온전히 믿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믿어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선생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