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글이 될 것 같은데 끝까지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후기를 쓰기까지 며칠을 고민했어요. 제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봅니다.
저는 올해 마흔둘인 여자예요.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가 드라마 같다고 느끼실 수도 있는데 전부 제 실제 이야기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남자아이가 있었어요. 키가 크고 말이 없는 애였는데 쉬는 시간마다 창가에서 책을 읽고 있었거든요. 어느 날 제가 먼저 ''뭐 읽어?''라고 말을 걸었고 그게 시작이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제가 왜 그렇게 용감했는지 모르겠어요.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먼저 용기를 낸 적이 없는 사람이 됐으니까요.
고3 때 사귀기 시작했는데 손 한번 잡는 것도 한 달이 걸렸어요. 수능 끝나고 같이 걸었던 한강 산책로, 크리스마스이브에 처음으로 뺨에 했던 뽀뽀, 졸업식 날 교문 앞에서 찍은 사진. 스물이 채 안 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랑이었어요. 근데 대학을 서로 다른 도시로 가게 됐고 처음엔 매일 전화하다가 일주일에 한 번이 되고 한 달에 한 번이 되더니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어요. 정식으로 헤어지자는 말도 없이요. 그냥 서로의 일상에서 조용히 사라진 거예요.
그 뒤로 저는 직장 다니면서 만난 사람과 결혼했어요. 나쁜 사람은 아니었는데 함께 있어도 외로운 결혼 생활이었어요.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는 더 심해졌고요. 대화는 아이 얘기뿐이었고 저는 점점 ''아내''와 ''엄마''라는 역할 안에서 ''나''를 잃어가는 느낌이었어요. 결국 6년 전에 이혼했습니다. 합의 이혼이었는데 그 과정이 평화로웠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어요. 아이한테 미안한 마음, 부모님 실망시켰다는 죄책감, 그리고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인가 봐''라는 생각이 매일 밤 저를 짓눌렀어요.
이혼 후 몇 년은 정말 하루하루를 버텼어요. 출근하고 일하고 아이 픽업하고 밥 해주고 재우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연애 같은 건 상상도 못 했어요. 아니, 솔직히 말하면 자격이 없다고 느꼈어요. 한번 실패한 사람이 뭔 연애를 하냐고. 마흔이 넘은 이혼녀가 누구를 만나냐고. 이런 생각들이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 된 줄도 모르고 몇 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다 올해 3월에 고등학교 동창 단톡방에서 동창회 공지가 올라왔어요. 안 가려고 했는데 친한 친구가 ''너 너무 집에만 있는다 좀 나와''라고 해서 억지로 갔거든요. 레스토랑에 들어서는데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보였어요. 이십 년이 지났는데도 한눈에 알아봤어요.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좀 섞여 있었고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있었는데 창가에서 조용히 뭔가를 읽고 있는 그 모습이 고2 때 교실에서 보던 그 장면이랑 겹치면서 순간 숨이 멈추는 것 같았어요.
눈이 마주쳤을 때 그 사람도 저를 바로 알아봤어요. ''야, 너 진짜 하나도 안 변했다''라고 하는데 목소리가 살짝 떨리더라고요. 저도 떨렸어요. 마흔이 넘은 어른 둘이 레스토랑 한구석에서 고등학생처럼 어색하게 웃고 있었어요. 그날 2차로 옮겨서 다른 친구들이랑 같이 술을 마셨는데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앉게 됐고 새벽까지 이야기했어요. 그쪽도 4년 전에 이혼했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그 뒤로 연락처를 교환하고 가끔 만났어요. 처음엔 ''옛날 친구니까''라고 스스로한테 핑계를 댔는데 솔직히 만나기 전날 밤에 옷을 서너 벌씩 꺼내놓고 고르는 제 모습을 보면서 ''아 이건 아닌데''라고 느꼈어요. 분명히 설레는 건데 그걸 인정하는 게 너무 무서웠어요. 또 실패하면 어떡하지. 이 나이에 이런 감정이 말이 되나. 혹시 그냥 외로워서 옛 추억에 기대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끝없이 맴돌았어요.
그래서 박도사를 신청한 거예요. 누군가한테 이 감정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받고 싶었어요. 친구한테 말하면 ''그냥 만나봐~'' 이런 가벼운 답만 돌아올 게 뻔하고 혼자서는 도저히 판단이 안 서니까요.
결과지가 왔을 때 밤 11시쯤이었는데 아이 재워놓고 거실 소파에 앉아서 읽기 시작했어요. 선생님이 두 사람 사주를 겹쳐놓고 분석해 주셨는데 첫 문장부터 눈물이 나왔어요. ''이 두 사람은 본래 만나야 했던 인연인데 시기가 맞지 않아서 한 바퀴 돌아간 케이스입니다.'' 이게 첫 줄이었어요.
고등학교 때 만난 게 우연이 아니라고 하셨어요. 서로를 알아보는 기운이 분명히 있었는데 그때는 둘 다 자기 자신도 완성되지 않은 상태라 그 인연을 지탱할 힘이 부족했대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멀어진 거고 각자 다른 사람을 만나고, 결혼하고, 실패하고, 상처받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는 거예요. 그 과정이 없었으면 지금 다시 만나도 또 같은 이유로 멀어졌을 거라고요. 이 부분 읽으면서 거실에서 소리 없이 한참을 울었어요. 이혼하고 나서 그렇게 자신을 탓하고 부끄러워했는데 그게 실패가 아니라 이 사람에게 돌아오기 위한 과정이었다니까요. 마치 이십 년 동안의 상처가 갑자기 의미를 갖게 된 느낌이었어요.
선생님이 상대방 사주도 자세히 봐주셨는데 그쪽도 이혼 후에 ''다시는 누군가를 깊이 좋아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고 마음을 닫았었대요. 그런데 저를 다시 만나면서 그 벽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거라고요. 다만 한번 크게 다친 사람이라 자기감정을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을 거래요. 겉으로는 담담하게 ''옛날 친구니까''라고 하면서 속으로는 이미 많이 흔들리고 있을 거라고요. 이걸 읽는 순간 지난번에 만났을 때 그 사람 표정이 떠올랐어요. 분명히 저를 보면서 눈이 웃고 있었는데 일부러 시선을 피하던 그 모습이. 아 이 사람도 무서운 거구나. 나처럼.
그리고 선생님이 조심하라고 하신 부분이 있었어요. 둘 다 상처가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연인 관계로 뛰어들면 과거의 트라우마가 겹쳐서 오히려 서로를 다치게 할 수 있대요. 최소 세 달은 연인이 아닌 상태로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과거의 그 사람이 아닌 지금의 이 사람을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셨어요. ''열여덟 살의 그 아이를 사랑하는 건지, 마흔두 살의 이 사람을 사랑하는 건지 스스로 구분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세요''라는 문장이 결과지에 있었는데 이게 제가 가장 두려워하던 질문을 정확하게 짚어준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게 이 사람인지 추억인지.
그래서 지금 선생님 말씀대로 하고 있어요. 일주일에 한두 번 만나서 산책하거나 조용한 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 서로의 이십 년을 채우고 있어요. 결혼 생활이 어땠는지, 이혼 후에 어떤 밤들을 보냈는지, 아이한테 어떤 부모이고 싶은지. 이런 이야기들을 하면서 이십 년 전에는 몰랐던 이 사람의 깊이를 알아가고 있어요. 고등학교 때는 ''책 읽는 멋있는 남자애''였는데 지금은 ''상처를 안고도 매일 아침 일어나서 살아가는 어른''이더라고요. 그게 이십 년 전의 설렘과는 다른 종류의 감정을 갖게 해요. 그때는 가슴이 뛰었다면 지금은 가슴이 따뜻해져요.
지난주에 같이 한강을 걸었는데 그 사람이 갑자기 ''여기 우리 고3 때 걸었던 데 아니야?''라고 하더라고요. 기억하고 있었어요. 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고개만 끄덕였는데 그 사람이 조용히 ''그때 여기서 네가 좋다고 말할 걸''이라고 했어요. 그 한마디에 이십 년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걸으면서 소리 없이 울었는데 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그냥 옆에서 같이 걸어줬어요.
아직 우리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선생님 말씀대로 천천히 가려고 해요. 조급하지 않으려고요. 이번에는 틀리고 싶지 않으니까요. 다만 이 상담을 받지 않았더라면 저는 아마 두 가지 중 하나를 했을 거예요. 무서워서 도망치거나 조급해서 망치거나. 선생님이 제가 몰랐던 저의 구조를 알려주시고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법을 알려주시고 무엇보다 ''당신이 지나온 시간은 실패가 아니라 이 순간을 위한 준비였다''는 말씀을 해주셨거든요. 마흔둘에 받은 사주 상담이 인생에서 가장 큰 위로가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분 중에 저처럼 한번 크게 다쳐서 다시 사랑하는 게 두려운 분이 계시다면 한번 받아보세요. 기대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다만 혼자서 안고 있던 짐을 누군가가 같이 들여다봐 주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경험을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좋은 소식이 생기면 꼭 다시 오겠습니다. 선생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