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일곱 살, 결혼 20년 차입니다. 남편과 저 사이에 사랑이 남아있는지 솔직히 모르겠어서 상담 받았어요. 미움도 아니고 사랑도 아닌, 그냥 같은 집에 사는 사람이 된 느낌이에요. 아침에 눈을 뜨면 옆에 사람이 있는데 없는 것 같아요. 밥 먹을 때도 각자 폰만 보고, 잠자리는 3년째 없고, 대화라고 해봐야 아이들 학원비 얼마냐, 다음 주 일정 어떻게 되냐 이런 사무적인 것뿐이에요. 가끔 이 사람이 사라져도 내가 모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 스스로가 무서웠어요.
돌이켜보면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지 정확히 모르겠어요. 결혼 초반 5년은 정말 좋았어요. 남편이 퇴근길에 꽃을 사오고, 주말에 영화 보면서 손을 잡고, 밤에 이불 속에서 수다를 떨다 잠들었어요. 첫째가 태어나면서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어요. 아이 울음소리에 잠을 깨고, 기저귀 갈다가 싸우고, 육아 분담으로 갈등하고. 그래도 그때는 같이 힘든 거라 묶여있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그런데 둘째까지 낳고 10년이 지나니까 우리 사이에 아이 말고 아무것도 안 남은 거예요. 남편과 마지막으로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한 게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나요.
어느 순간부터 남편의 존재가 가구 같아졌어요. 거실 소파처럼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감정이 없으니까 싸우지도 않아요. 차라리 싸우면 나은데 무관심이 가장 잔인한 거더라고요. 서로의 감정에 관심이 없으니까 슬퍼도 화가 나도 혼자 삼켜요. 울고 싶을 때 화장실 샤워기를 틀어놓고 울었어요. 물소리에 울음소리가 묻히니까요. 남편이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데 저는 샤워실에서 울고 있는, 그 거리감이 우리 관계의 전부예요.
주변에서 보기에는 안정적인 가정이에요. 남편은 성실하게 벌고, 아이들은 잘 크고, 집도 있고 차도 있고. 겉으로 보면 부러울 것 없는 가정인데 안에서는 텅 비어있어요. 결혼기념일이 지나가도 서로 축하 한마디 없어요. 작년 기념일에 혹시나 해서 남편이 뭔가 해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녁에 남편한테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 했더니 한참 생각하다가 "아, 기념일이었나?" 하더라고요. 20년인데. 스무 번째 기념일인데. 화가 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허무했어요. 기대조차 하지 말아야 하는 관계가 된 거구나.
올 초에 남편 핸드폰에서 모르는 여자와 카톡하는 걸 봤어요. 남편이 충전하려고 식탁에 올려놓은 폰에 알림이 떠서요. 내용 자체는 별거 아니었어요. 회사 후배인 것 같았고 업무 관련 대화였어요. 그런데 대화 톤이 너무 달랐어요. 저한테는 맨날 한 줄 답장, "응", "그래", "알겠어". 그런데 그 후배한테는 이모티콘을 쓰고, 웃긴 짤을 보내고, "오늘 고생했어요~" 라는 말도 하더라고요. 그 물결표 하나에 가슴이 찢어졌어요. 나한테는 한 번도 안 쓰는 물결표를. 다른 여자한테는 쓰는구나.
그날 밤에 혼자 울었어요. 바람을 피운 건 아니에요. 업무 대화인 걸 아니까 따질 수도 없어요. 그런데 그 대화를 보면서 확인한 건, 내가 이 사람한테 더 이상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거였어요. 회사 후배한테 쓰는 친절함조차 나한테는 아끼는 사람. 내가 20년을 바친 사람이 이 정도인 건가.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보는데 눈물이 옆으로 흘러서 베개가 젖었어요. 옆방에서 아이가 자고 있으니까 소리도 못 내고 입술을 깨물었어요.
그 후로 남편을 볼 때마다 물결표가 떠올랐어요. 밥 먹을 때도, TV 볼 때도, 같은 공간에 있으면 그 물결표 하나가 저를 찔렀어요. 하찮은 물결표 하나에 20년 결혼 생활이 흔들리는 게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 물결표는 상징이잖아요. 이 사람이 나한테 쏟지 않는 감정의 상징. 예전에는 남편이 저한테도 그랬어요. 연애할 때 매일 보내던 굿나잇 문자에 항상 물결표가 붙어있었거든요. 잘 자~, 사랑해~, 오늘 고생했어~. 그 물결표가 사라진 게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서 더 슬펐어요.
상담을 신청한 건 이 결혼을 계속할 이유가 있는지 객관적으로 들어보고 싶어서였어요. 제 감정만으로는 판단이 안 되더라고요. 이혼하자니 아이들이 마음에 걸리고, 참자니 남은 인생이 30년은 남았는데 이렇게 투명인간으로 살 수는 없잖아요. 어느 쪽이든 대가가 너무 커서 결정을 못 하고 있었어요. 친구한테 말하면 "원래 결혼이 다 그래"라고 하고, 엄마한테 말하면 "참고 살아, 니 팔자야"라고 해요. 언니한테 말하면 "넌 그래도 남편이 성실하잖아" 하고요. 아무도 제 마음을 진짜로 들여다보지 않았어요.
선생님이 두 사람 사주를 보시면서 이 부부는 원래 정이 아주 깊은 인연이라고 하셨어요. 감정이 완전히 식은 게 아니라 얼어있는 상태래요. 얼음도 온도가 올라가면 녹듯이 적절한 열을 가하면 돌아올 수 있다고요. 남편 사주에서 올해 전환의 에너지가 강하게 들어오는데, 이걸 부부 관계 개선으로 돌릴 수 있는 창이 있다고 하셨어요.
가장 와닿았던 건 선생님이 저한테 하신 질문이에요. "남편이 내일 당장 집을 나간다고 하면 어떤 감정이 드실 것 같으세요?" 그 질문을 받는 순간 심장이 철렁했어요. 솔직히 홀가분할 줄 알았어요. 드디어 끝나는구나 할 줄 알았는데 무서웠어요. 이 사람이 진짜 없어지면 어떡하지, 라는 공포. 그 반응이 답이라고 하시더라고요. 무감각해진 거지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고. 얼어붙은 감정은 녹일 수 있지만, 없는 감정은 만들 수 없다면서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어딘가에서 따뜻한 게 올라왔어요. 20년 동안 잊고 있었던, 이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렘 같은 것이 아주 희미하게.
선생님은 작은 것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하셨어요. 하루에 한 번이라도 남편 눈을 보고 말하기, 일주일에 한 번은 같이 15분 산책하기, 한 달에 한 번은 아이 없이 둘이 밥 먹기.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라 이런 미세한 습관이 얼어붙은 감정을 천천히 녹인다고. 그리고 제가 먼저 물결표를 쓰라고 하셨어요. 남편한테 카톡 보낼 때 "밥 먹어" 대신 "밥 먹었어?~" 라고요. 웃기면서도 뜨끔했어요. 남편만 탓했는데 저도 이 사람한테 정성을 안 쏟고 있었구나.
상담 받고 일주일 후에 남편한테 갑자기 같이 저녁 먹자고 했어요. 남편이 진짜 놀란 표정으로 "무슨 일 있어?" 하더라고요. 그 반응이 씁쓸하면서도 우리가 정말 오래 방치했구나 깨달았어요. 식당에서 어색하게 앉아서 메뉴판만 들여다보는데, 문득 이 식당에서 연애 초에 처음 같이 밥 먹었던 게 떠올랐어요. 그 얘기를 했더니 남편도 기억하더라고요. 그때 제가 매운 걸 못 먹는다고 했는데 지금은 잘 먹는다면서 웃었어요. 남편이 웃는 걸 본 게 몇 달 만인지 모르겠어요.
집에 오는 길에 남편이 제 옆에서 걸으면서 "우리 이런 거 좀 자주 하자"라고 했어요. 아무것도 아닌 한 마디인데 눈물이 나올 뻔했어요. 20년 동안 쌓인 벽이 한 번의 식사로 무너지진 않겠죠. 하지만 적어도 벽에 문 하나를 낸 느낌이에요. 그날 밤에 남편한테 카톡으로 "오늘 고마웠어~"라고 보냈어요. 물결표를 붙이면서 손가락이 떨렸어요. 남편이 답장을 보냈어요. "나도~". 그 물결표 하나를 보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울었어요. 이번에는 슬퍼서가 아니라 아직 늦지 않았다는 안도감 때문에. 이 상담이 아니었으면 그냥 체념하고 살았을 것 같아요.